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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형산강 남쪽으로 가는 포항시민 피난 행렬. /트루만박물관 소장, ‘포항 6·25’ 발췌
6·25전쟁 때 폐허로 변한 포항 시가지 모습. /‘포항 6·25’ 발췌
6·25전쟁 때 무탈히 남았던 포항제일교회(현 포항소망교회). /노컷뉴스, 네이버 블로그
인민군의 기습적 전면전 남침, 1950년 6월25일 새벽으로부터 두 달도 못 버틴 8월 초순에 동해 남단 포항마저 위태한 형세였다.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며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려는 맥아더의 전략에서 포항은 낙동강 전선의 주요 요충지이자 위장·교란 상륙작전 후보 지역이었다. 8월10일 포항에 모였던 피난민과 토박이들이 남부여대 피난 행렬로 나섰다. 한흑구네 여섯 가족과 동행한 피난민은 일흔셋이었다. 해도동 갈대밭을 지나 형산강 다리 앞에 닿았다. 미군 헌병이 길을 막자, 한흑구가 설명했다. 형산강 다리를 건너도 좋다고 허락했다. 단, K3 비행장(포항비행장) 쪽으로는 갈 수 없었다. 오천-감포-울산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택한 그들은 울산에 도착하자 거의 모두가 안전한 곳이라며 주저앉았다. 한흑구는 멈추지 않았다. 막내딸을 아내와 번갈아 업으며 꼬박 이레를 걸어서 동래 다리 밑의 피난민들 틈에 하룻밤 노숙을 했다.
그날 밤을 아버지는 ‘노랫소리’로 기억한다. “늦여름의 이슬을 피하는 다리 밑에는 13도의 피난민이 다 모인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은 버라이어티 쇼나 하듯이 13도의 노래를 다 불렀다. 미친 사람의 아우성 같은 노랫소리뿐이었다.” 어린 장남은 그날 밤을 ‘하얀 빨래’로 기억한다. “하룻밤 자고 나니 온 산이 하얬어요. 피난민들이 이불을 말리느라 관목 위에 올려놓은 거였지요.”
부산 피난 시절 ‘에덴다방’이 있던 광복동 거리. /네이버 블로그
1950년 10월 평양수복 직후 평양시민환영대회. /네이버 블로그
한흑구 가족의 피난살이 고초는 동래 다리까지였다. 다음날부터 마흔한 살의 가장(家長)은 수영비행장 미군 부대의 통역관이 되었다. 인연은 언제나 불가사의한 것. 서울의 인연이 피난 도시 부산으로 이어졌다. 첫 월급을 타서 맨 먼저 조지훈과 오상순, 종군기자로 나선 두 시인과 해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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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뒤부터 한흑구는 부산 최초의 다방 ‘에덴다방’에 단골로 등장했다. 거기는 피난 예술가들에게 ‘숨터’ 공간이었다. 유치환, 조지훈, 오상순, 김송(희곡작가, 1909-1988) 등은 미리 진을 치고 퇴근하는 한흑구를 기다렸다. 그의 ‘문단 교우록’에 남은 장면이다.
“나는 그들이 마신 찻값을 치르고, 빈대떡을 놓고 소주를 몇 되씩 마셔야 속이 시원했다. 모두 군복을 입은 종군기자들이었고, 찻값은커녕 화랑담배도 떨어지는 형편에 있었다. 이런 형편을 잘 아는 나는 매일같이 이들을 찾아서 술로써 시끄러움을 씻어주고자 하였다. 어떤 때는 이들과 함께 남포동 ‘갈매기’ 집에 앉아서 생선회와 술에 취하고, 훨훨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에 취하기도 하였다. 또 하루는 밤을 새워가며 정종 열 되를 중국요리와 함께 실컷 먹은 것이 청마, 지훈, 공초, 이숭녕(그때 박사가 아니었다)씨, 그리고 나까지 5인이었다. 부산 피난머리에 ‘최고의 밤’이었다는 것을 나는 늘 기억하고 있다.”
10월19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해방했다. 문인, 화가, 연예인 대표들이 미8군 군용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가야 했다. 문인 대표 3인이 뽑혔다. 조지훈, 김송, 그리고 한흑구. 평양이란 말만 들어도 설레는 사람이 동행을 졸라대는 조지훈에게 웃으며 말한다. “나는 모란봉에 모란꽃이 피면 평양에 가겠네.” 영어 신문들을 꼼꼼히 읽는 한흑구는 차마 말을 하진 않아도 베이징의 마오쩌둥을 찜찜하게 보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 리더가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중국의 이마라 여기든 항문이라 여기든 거기를 상시로 미국의 총구가 겨누게 되는 형세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모란봉에는 모란꽃이 피지 않는다. 모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란봉에는 언제나 모란꽃이 피어나는 중이다. 모란봉이란 피어나는 모란꽃을 닮아서 매겨진 이름이라니!
한흑구는 1951년 봄날에 가족을 데리고 부산을 떠났다. 피난 가던 때는 짐을 지고 어린 딸을 안고 업고 일주일을 꼬박 걸었지만, 돌아오는 길은 트럭을 탔으니 거의 금의환향 행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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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 시가지는 무참히 부서져 있었다. 함포, 야포, 폭격. 온갖 포탄들이 다 떨어졌다. 폐허, 그 자체였다. 제일교회 예배당만 오롯이 버티는 시가지를 바라보는 순간, 한흑구는 어차피 새로 시작할 바에는 부산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불끈거렸다. 그런데 산산조각 흩어졌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낡은 집’도 멀쩡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살아남은 집을 주인은 ‘평화의 집’이라 명명했다.
K3 통역관 시절의 한흑구. /한동웅 제공
K3 통역관 시절의 한흑구. /한동웅 제공
평화의 집으로 하루는 미군 장교가 찾아왔다. 곧이어 한흑구는 K3 미공군 통역관이 되었다. 퇴근할 때 정문의 헌병 앞에 멈추지 않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손에 무엇을 들고나오든 그는 그냥 통과했다. 프리-패스 맨, 이것은 미군 장교들이 문학인 한흑구의 인격에 보내는 존경과 신뢰였다. 이때부터 그는 포항 재건에 미군의 힘을 불러온다. 장남의 증언이다. “아버지는 포항 미군부대에 근무하면서 알게 모르게 포항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지. 6·25전쟁 때 불타버린 포항여고 교사(校舍) 복구라든지 미 해병 기념 소아진료소 지원에도 아버지의 손길이 닿았어. 그때는 그런 일이 미군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거든.” 알게 모르게, 이 표현에서 ‘알게’는 미군을 데리고 현장에 나타나 샬라샬라 설명하는 한흑구의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의 입에서 번져 나간 소문이고, ‘모르게’는 그야말로 드러내지 않는 자리에서 전쟁고아를 보듬은 곳에 미군의 지원을 끌어댄 노력이다. 그는 준다고 해도 손을 내저었겠으나 무슨 감사패 따위를 받은 적이 없다.
1953년 7월27일 동족상잔은 휴전협정에 따라 총성을 멈추었다. 지구상 가장 살벌한 철책선이 한반도의 허리를 다시 쓰라리게 갈라놓는다. 한흑구는 아버지로서 큰 아픔을 겪었다. 셋째 동현이가 뇌막염으로 숨을 거둔 것이었다. 셋째를 가슴에 묻은 방정분은 막 시작했던 유치원 교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유아를 돌보자니 죽은 아들이 눈에 밟혀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슬픔과 아픔을 견딜 만해지면 큰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길은 있었다. 이화여전 음악과를 나온 방정분은 머잖아 포항여중 음악 교사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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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어느 날, 동지중 2학년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이 교과서에 나온 수필 ‘나무’를 읽고 나서 질문했다. “이 글을 쓴 한흑구라는 분이 포항에 살고 계시는데,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있느냐?” 그의 장남이 빨개진 얼굴을 숙이는 순간, 선생님이 말했다. “너희들의 친구, 한동웅 군의 아버지 되신다.” 이때부터 한동웅은 교내 스타로 떠올랐다.
서울신문사에서 발간하던 ‘신천지’의 표지. /네이버 블로그
포스텍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뜬 박태준과 김호길. /이대환 제공
전쟁 기간에 세계 철강왕으로 불리는 미국 앤드루 카네기의 ‘출세 비화록’ 등 잡문 몇 편만 쓰고 말았던 한흑구는 다시 문학의 펜을 들었다. 포항을 ‘진정한 제2의 고향’으로, ‘뼈를 묻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대평양’을 꿈꾸기도 했던 본향을 돌아갈 수 없는 고향, 꿈속의 고향으로 간직한 그는 각처 사람들이 어우러져 전후 폐허를 이겨내는 포항의 활기찬 기상을 전국적으로 자랑하고 싶었다. 이것이 1954년 ‘신천지’에 발표한 수필 ‘동해안의 신흥도시 포항’이다. 그때 포항시민은 몰랐으나 포항의 활력을 최초로 널리 알린 애향의 글이다.
“푸르고 맑기로 이름난 동해, 영일만의 호수와 같이 잔잔한 물결 위에는 날마다 밤의 장막을 들치고 한국의 새날이 고요히 열린다. 날이 새기도 전부터 수십 척의 고기잡이배들이 만심(灣心)을 채우고, 밤사이의 공복을 채우려고 감도는 갈매기들의 떼들이 들어오는 호수 위를 나즉이 날은다.
이 그윽한 광경을 클로즈업하며 불쑥 지평선을 솟아오르는 태양의 얼굴은 한없이 엄숙하고, 새맑고, 따뜻하다. 이 빛나고 깨끗한 아침을 맞는 만곡(灣曲)을 이름하여 영일만(迎日灣)이라고 부르고, 이 둥그런 영일만을 두르고 있는 지대를 영일군이라 이름한다. 포항은 바로 이 영일 군내(郡內)에 위치한 어항의 신도시이며, 북위 36도, 동경 129도에 놓여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1954년의 포항을 한흑구는 ‘한국의 새날이 고요히 열리는 어항의 신도시’라 불렀다. 이 신도시는 1970년 4월 포항종합제철(POSCO)이 대역사(大役事)의 막을 올려 ‘한국 산업화의 새날’을 열게 되고, 1995년 1월1일 포항시는 영일군을 통합한다. /이대환 작가
부산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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