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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 전라도 발포진 만호가 되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웅’(聖雄)이다.
2014년 개봉된 이순신이 주인공인 영화 ‘명량’은 1천761만 명이 관람하면서 역대 신기록을 세운다.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명량’이 관람객 수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이순신이 ‘성웅’으로까지 존경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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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이순신 동상(해남 명량)
그 단서 중 하나가 영화 ‘명량’의 마지막 장면, 아들 회가 “아버지의 ‘충’(忠)은 누구에 대한 충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이순신은 “ 바다이야기무료 백성에 대한 ‘충’이었느니라”라고 대답한다. 백성에 대한 ‘애민’(愛民)’의 실천이 오늘 이순신을 기리고 존경하는 이유는 아닐까 싶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1545년(인종 즉위년) 한성부 건천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汝諧) 골드몽 이고 시호는 충무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지금 무덤이 있는 아산은 외가 동네로 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伏羲), 요(堯), 순(舜), 우(禹)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첫째부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이름을 짓는다. 아들 이름을 짓는 솜씨를 보니 부친 이정도 릴게임5만 보통 분은 아닌 것 같다.
이순신은 32살이던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고,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 된다. 이어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을 거쳐 1580년(선조 13) 종4품 전라도 발포진의 만호에 임명된다. 남도와의 첫 인연이었다.
이순신의 발포 만호 부임은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해 바다이야기무료 석하는 분도 있다. 바람 앞에서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조선을 구한 ‘신의 한 수’였음은 분명하다.
근거는 이렇다. 첫째, 발포 만호는 이순신 최초의 수군 경험이었다. 이순신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첫 관직을 받은 후 육군만 경험했다. 둘째는 벼슬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일선 지휘관이 된다. 그동안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셋째는 전라좌수영과의 인연이다. 전라좌수영 관할의 5관 5포 중 1관 4포가 고흥에 존재했다.
발포 만호 18개월은 전라도의 바닷길과 지역 실정, 수군 인맥을 쌓는 더없이 소중한 기간이었다. 즉, 발포 만호 시절에 있었기에, 12년 뒤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바닷길을 제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발포 만호 시절 이순신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오동나무’를 베어 바치라는 전라좌수사의 명을 거부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므로 공(이순신)은 허락하지 않고,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요 또 여러 해 길러온 것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베어버릴 수 있겠소’ 하고는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사 성박은 크게 화를 냈지만, 이순신의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했던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 때문에 베어가지 못한다. 발포진성에 이를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청렴 광장’이 조성된 연유다.
발포 만호 시절의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성은 향후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된다.
-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되다 1589년(선조 22), 이순신은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 현감이 된다. 이어 1591년(선조 24) 진도군수로 승진되어 부임 도중 종3품 가리포 첨사로 발령이 난다. 그런데 가리포 첨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종6품 정읍 현감에서 곧바로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셈이니,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전라좌수사가 부임한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본영이 있다.
고흥 발포진에 이어 다시 남도와 인연을 맺었고, 남도와의 두 번째 인연은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든다.
부임 1년 뒤인 1592년(선조 25) 4월13일, 20여 만의 일본군이 부산성을 침략했고, 당일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된다. 20일 만에 한양이, 두 달 만에 평양마저 함락되자,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조선을 지켜낸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이었다.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 해전에서 연승을 거두며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바닷길을 봉쇄하여 보급로마저 끊는다. 일본군이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서남해안 일대로 내려와 웅거(雄據)한 이유다.
이순신은 경남 일대에 포진한 일본군으로부터 군량의 40%를 책임지고 있던 호남을 지켜내기 위해 통영 앞에 있는 한산도로 이동, 전라좌수영군을 전진 배치한다. 이 내용은, 이순신이 영암 구림에 살던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글 속에 “호남 국가지 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시이작일 진진우한산도(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是以昨日 進陣于閑山島)”라고 남아 있다. 해석하면 이렇다.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다.”
‘약무호남시무국가비’(영암 구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군이 한산도로 전진 배치된 것은 호남의 보존이었고, 호남 보존의 이유는 호남이 없어지면 국가도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옮겨간 날이 편지를 쓴 앞날이었다. 편지를 쓴 날이 1593년 7월16일이었으니, 7월15일 옮겨갔음도 확인된다. 그리고 8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조선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 남도땅에서 수군을 재건하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꾐에 넘어간 조정은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대신 원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다. 1597년(선조 30) 7월16일,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박살난다. 남은 함선은 경남우수사 배설이 가지고 도망쳐 나온 12척이 전부였다.
깜짝 놀란 조정은 동년 7월22일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명했고, 선전관 양호를 통해 임명장을 전달한다. 이순신이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의 한 가옥에서 임명장을 받은 날은 8월3일이었다.
임명장을 받자마자 이순신은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만을 대동하고 당일 전라도 구례 석주관을 넘는다.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곡성을 거쳐 순천으로 들어갔고, 순천에서 병기를 확보한 후 낙안을 거쳐 보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성에서 고대하던 군량을 확보한다. 이순신은 1597년 8월9일자 ‘난중일기’에 “저녁 무렵 보성 조양창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오늘 보성에 남아 있는 지명 ‘득량’(得糧)은 이순신이 군량을 얻은 곳이라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보성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선전관 박천봉이 “조선 수군을 육군에 통합하라”는 선조의 유지(諭旨)를 전했기 때문이다. 이날이 8월15일, 보름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열선루(列仙樓)에서 어명을 거스르는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전선은 비록 적으나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일본군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올린다. 이 내용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남아 있다.
이순신이 직접 쓴 8월15일자 ‘난중일기’에는 “열선루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어명을 거역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과음했다는 것이다. 행간에서 이순신의 고뇌가 읽힌다.
그리고 8월19일, 조선 수군을 재건한 이순신은 장흥 회령진성에서 출전을 결의한 후 해남 어란진을 거쳐 8월29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다. 그리고 9월16일 명량에서 13척의 함대로 적선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둔다. ‘명량대첩’이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명량에서의 대승을 ‘천행’(天幸)이라고 했지만, 수군 재건을 도운 남도인과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전략이 어우러져 이루어 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 여수에 충민사가 건립되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21개소 중 절반이 넘은 11개가 광주·전남에 건립된다. 이는 광주·전남이 이순신의 주 활동지였음과 동시에 남도인들이 가슴 속에 품고 사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신임을 보여준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사당으로는 순국지인 남해에 건립된 ‘충렬사’와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의 ‘충렬사’, 무덤이 있는 아산의 ‘현충사’,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의 ‘충민사’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사당은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 건립된 충민사다.
여수 충민사는 영의정인 백사 이항복의 주청(奏請)을 받아 왕명으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시언이 1천600년(선조 33)에 건립한 사당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자라고, 그의 시신이 모셔진 아산 현충사보다도 106년이나 빠르다.
이순신이 병을 치료한 해남군 이진 마을 전경
벽파진 전첩비(진도)
남도에는 이순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사당만 있는 곳은 아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그의 수군 첫 발령지인 고흥 발포진에는 ‘발포역사전시체험관’이 들어서 있고, 여수에는 ‘이순신 광장’이 조성돼 있으며, 삼도수군통제영이 마지막 들어선 완도 고금도에는 그의 시신을 잠시 묻었던 ‘월송대’도, 그를 기리는 ‘이순신 기념관’도 건립돼 있다.
그가 병을 치료했던 해남 ‘이진’ 마을도, 완도와 진도 사이에서 일어난 명량대첩을 기리는 ‘벽파진 전첩비’와 ‘명량대첩비’도, 명량 전투를 지휘했던 ‘지휘하는 이순신’,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도 현장을 기억하며 서 있다.
- 전라도 발포진 만호가 되다
충무공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성웅’(聖雄)이다.
2014년 개봉된 이순신이 주인공인 영화 ‘명량’은 1천761만 명이 관람하면서 역대 신기록을 세운다.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명량’이 관람객 수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이순신이 ‘성웅’으로까지 존경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션파라다이스릴게임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해남 명량)
그 단서 중 하나가 영화 ‘명량’의 마지막 장면, 아들 회가 “아버지의 ‘충’(忠)은 누구에 대한 충이었습니까”라고 묻자, 이순신은 “ 바다이야기무료 백성에 대한 ‘충’이었느니라”라고 대답한다. 백성에 대한 ‘애민’(愛民)’의 실천이 오늘 이순신을 기리고 존경하는 이유는 아닐까 싶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1545년(인종 즉위년) 한성부 건천동(현,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汝諧) 골드몽 이고 시호는 충무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지금 무덤이 있는 아산은 외가 동네로 소년기를 보낸 곳이다.
이정은 자신의 네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伏羲), 요(堯), 순(舜), 우(禹) 임금의 이름자를 붙여 첫째부터 희신, 요신, 순신, 우신으로 이름을 짓는다. 아들 이름을 짓는 솜씨를 보니 부친 이정도 릴게임5만 보통 분은 아닌 것 같다.
이순신은 32살이던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하였고,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이 된다. 이어 훈련원 봉사, 충청 병사 군관을 거쳐 1580년(선조 13) 종4품 전라도 발포진의 만호에 임명된다. 남도와의 첫 인연이었다.
이순신의 발포 만호 부임은 ‘조선을 구하라는 하늘의 뜻’으로 해 바다이야기무료 석하는 분도 있다. 바람 앞에서 등불처럼 위태로웠던 조선을 구한 ‘신의 한 수’였음은 분명하다.
근거는 이렇다. 첫째, 발포 만호는 이순신 최초의 수군 경험이었다. 이순신은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으로 첫 관직을 받은 후 육군만 경험했다. 둘째는 벼슬길에 오른 후 처음으로 일선 지휘관이 된다. 그동안은 지휘관을 보좌하는 역할이 전부였다. 셋째는 전라좌수영과의 인연이다. 전라좌수영 관할의 5관 5포 중 1관 4포가 고흥에 존재했다.
발포 만호 18개월은 전라도의 바닷길과 지역 실정, 수군 인맥을 쌓는 더없이 소중한 기간이었다. 즉, 발포 만호 시절에 있었기에, 12년 뒤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바닷길을 제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발포 만호 시절 이순신의 명성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오동나무’를 베어 바치라는 전라좌수사의 명을 거부한 사건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다음처럼 나온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발포로 사람을 보내어 객사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려 하므로 공(이순신)은 허락하지 않고, ‘이것은 관청의 물건이요 또 여러 해 길러온 것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베어버릴 수 있겠소’ 하고는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사 성박은 크게 화를 냈지만, 이순신의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했던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 때문에 베어가지 못한다. 발포진성에 이를 기억하고 계승하기 위해 ‘청렴 광장’이 조성된 연유다.
발포 만호 시절의 투철한 책임감과 청렴성은 향후 조선 수군 최고 지휘관이 되는 데 밑거름이 된다.
-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되다 1589년(선조 22), 이순신은 류성룡의 추천으로 정읍 현감이 된다. 이어 1591년(선조 24) 진도군수로 승진되어 부임 도중 종3품 가리포 첨사로 발령이 난다. 그런데 가리포 첨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사)에 임명된다. 종6품 정읍 현감에서 곧바로 정3품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셈이니,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전라좌수사가 부임한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본영이 있다.
고흥 발포진에 이어 다시 남도와 인연을 맺었고, 남도와의 두 번째 인연은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든다.
부임 1년 뒤인 1592년(선조 25) 4월13일, 20여 만의 일본군이 부산성을 침략했고, 당일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함락된다. 20일 만에 한양이, 두 달 만에 평양마저 함락되자,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몽진(蒙塵)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조선을 지켜낸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의 수군들이었다.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적진포,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한산도, 안골포 해전에서 연승을 거두며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바닷길을 봉쇄하여 보급로마저 끊는다. 일본군이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서남해안 일대로 내려와 웅거(雄據)한 이유다.
이순신은 경남 일대에 포진한 일본군으로부터 군량의 40%를 책임지고 있던 호남을 지켜내기 위해 통영 앞에 있는 한산도로 이동, 전라좌수영군을 전진 배치한다. 이 내용은, 이순신이 영암 구림에 살던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글 속에 “호남 국가지 보장 약무호남 시무국가 시이작일 진진우한산도(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是以昨日 進陣于閑山島)”라고 남아 있다. 해석하면 이렇다.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진을 옮겼다.”
‘약무호남시무국가비’(영암 구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군이 한산도로 전진 배치된 것은 호남의 보존이었고, 호남 보존의 이유는 호남이 없어지면 국가도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옮겨간 날이 편지를 쓴 앞날이었다. 편지를 쓴 날이 1593년 7월16일이었으니, 7월15일 옮겨갔음도 확인된다. 그리고 8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조선 수군을 총괄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 남도땅에서 수군을 재건하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꾐에 넘어간 조정은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대신 원균을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삼는다. 1597년(선조 30) 7월16일,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박살난다. 남은 함선은 경남우수사 배설이 가지고 도망쳐 나온 12척이 전부였다.
깜짝 놀란 조정은 동년 7월22일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명했고, 선전관 양호를 통해 임명장을 전달한다. 이순신이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의 한 가옥에서 임명장을 받은 날은 8월3일이었다.
임명장을 받자마자 이순신은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만을 대동하고 당일 전라도 구례 석주관을 넘는다. 조선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곡성을 거쳐 순천으로 들어갔고, 순천에서 병기를 확보한 후 낙안을 거쳐 보성에 들어간다. 그리고 보성에서 고대하던 군량을 확보한다. 이순신은 1597년 8월9일자 ‘난중일기’에 “저녁 무렵 보성 조양창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창고에는 곡식이 묶여진 채 그대로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오늘 보성에 남아 있는 지명 ‘득량’(得糧)은 이순신이 군량을 얻은 곳이라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보성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선전관 박천봉이 “조선 수군을 육군에 통합하라”는 선조의 유지(諭旨)를 전했기 때문이다. 이날이 8월15일, 보름이었다. 이에 이순신은 열선루(列仙樓)에서 어명을 거스르는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전선은 비록 적으나 신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으니 (일본군이) 감히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올린다. 이 내용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남아 있다.
이순신이 직접 쓴 8월15일자 ‘난중일기’에는 “열선루에 앉아 있으니 선전관 박천봉이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니 심회가 편치 않았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잠을 자지 못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어명을 거역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과음했다는 것이다. 행간에서 이순신의 고뇌가 읽힌다.
그리고 8월19일, 조선 수군을 재건한 이순신은 장흥 회령진성에서 출전을 결의한 후 해남 어란진을 거쳐 8월29일 진도 벽파진에 도착한다. 그리고 9월16일 명량에서 13척의 함대로 적선 133척과 싸워 대승을 거둔다. ‘명량대첩’이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명량에서의 대승을 ‘천행’(天幸)이라고 했지만, 수군 재건을 도운 남도인과 이순신의 뛰어난 전술·전략이 어우러져 이루어 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 여수에 충민사가 건립되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21개소 중 절반이 넘은 11개가 광주·전남에 건립된다. 이는 광주·전남이 이순신의 주 활동지였음과 동시에 남도인들이 가슴 속에 품고 사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신임을 보여준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사당으로는 순국지인 남해에 건립된 ‘충렬사’와 한산대첩의 현장인 통영의 ‘충렬사’, 무덤이 있는 아산의 ‘현충사’,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의 ‘충민사’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의미있는 사당은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 건립된 충민사다.
여수 충민사는 영의정인 백사 이항복의 주청(奏請)을 받아 왕명으로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시언이 1천600년(선조 33)에 건립한 사당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자라고, 그의 시신이 모셔진 아산 현충사보다도 106년이나 빠르다.
이순신이 병을 치료한 해남군 이진 마을 전경
벽파진 전첩비(진도)
남도에는 이순신을 기억하고 기리는 사당만 있는 곳은 아니다.
노성태·남도역사연구원장
그의 수군 첫 발령지인 고흥 발포진에는 ‘발포역사전시체험관’이 들어서 있고, 여수에는 ‘이순신 광장’이 조성돼 있으며, 삼도수군통제영이 마지막 들어선 완도 고금도에는 그의 시신을 잠시 묻었던 ‘월송대’도, 그를 기리는 ‘이순신 기념관’도 건립돼 있다.
그가 병을 치료했던 해남 ‘이진’ 마을도, 완도와 진도 사이에서 일어난 명량대첩을 기리는 ‘벽파진 전첩비’와 ‘명량대첩비’도, 명량 전투를 지휘했던 ‘지휘하는 이순신’,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도 현장을 기억하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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