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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eastorygame.top
필자 박기성은 (사)한국山書會 회장이다. 서울大 문리대OB산악회장으로 〈사람과 산〉 편집장을 지냈다. 저서로 「삼국사기의 산을 가다」, 「명산」, 「울릉도」가 있다.
망향정 가는 길 전망대에서 본 산수절경 화룡점정_보산적벽 위의 망향정, 장항적벽 위의 옹성산… 이 모든 것을 아우른 적벽동천이 물 속에 잠겨있다.
1972년 3월, 화순 대곡리에서 출토된 청동기 11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얼마나 대 바다이야기다운로드 단한 것이었으면 확인된지 넉 달만에 전격 국보가 되었다. "청동기들의 제작 수준이 높고 종류도 다양하며 수량 또한 많은 데다 종교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청동방울과 거울, 정치적 권위를 드러내는 청동검이 동시에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무덤의 주인이 신분이 높은 지배층이면서 제사장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모델 케이스여서 그랬던 듯하다.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오징어릴게임 BP2560+120년으로 나왔는데 출토 유물의 종류로 판단하면 기원전 3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보여진단다(〈나무위키〉).
청동검은 세형동검(細形銅劍)이었다. 요서, 요동은 물론 한반도와 일본에서도 나오는 비파형동검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일대의 연해주에서만 보이는 이 칼을 나는 오랫동안 진국(辰國)의 표지유물로 여겼기 메이저릴게임사이트 때문에 관심이 많았다. 삼한으로 분화되기 전 한반도에 있었다는 나라 진국은 연나라에 밀려 요동에서 쫓겨난 옛 조선인들이 평양에서 세형동검문화를 일구고 남쪽과 동북쪽으로 퍼뜨렸다 싶어서였다. 연나라가 요동군을 점령한 것은 기원전 3세기라는 게 정설이다(〈위키백과〉).
그래서 우선 유물이 있는 광주박물관부터 찾았다. 신천지릴게임 유리 케이스 안에 든 칼은 앞에서도 보고 뒤에서도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길이 30cm 전후의 저걸로 삼한을 지배했단 말이지? 청동거울이나 팔주령(八珠鈴)의 용도는 알겠는데 폭 4.3cm에 길이 7.6cm의 청동도끼로는 도대체 뭘 했을까?
비파형동검과 바다이야기꽁머니 세형동검 분포도_적갈색으로 표시된 비파형동검은 요서, 요동, 한반도와 혼슈 서쪽 끝, 규슈 북단에서 출토된 반면 갈색의 세형동검은 한반도와 혼슈 중부, 블 라디보스톡 근처의 연해주까지 퍼져있다. 이 중 가장 많이 발견되는 데가 동남쪽 진방 (辰方)의 땅 진국이다.
국립광주박물관에 전시된 화순 대곡리 출토 세형동검들_확인된지 넉 달만에 전격 국보 가 되었다. 같이 발견된 청동방울과 다뉴세문경도 국보인데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 과는 BP2560+120년이라고 한다.
유물이 나왔다는 데는 지석천(砥石川)이라고도 하는 드들강 가 개화평야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었다. 내대곡(內大谷), 외대곡, 중대곡으로 나뉘어있을 만큼 큰 마을 가운데 동산으로 원래 대곡면의 중심이었는데 1914년 드들강 북쪽의 오도면과 통합, 도곡면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위세가 떨어졌다. 그럼에도 황금물결을 이루어 가는 널따란 들판을 굽어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뒷산 비봉산성으로 올라가본다. 195.5m 높이의 산에 쌓은 둘레 925m의 테뫼식 산성이니 청동기시대치고는 높은 데 있고 규모가 크다. 그만큼 땅이든 재물이든 쟁탈전이 치열한 데였다는 반증이리라. 인간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게 되는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남의 잉여물을 뺏으려 혈안이 되는 자들이 생겨났고 뺏기면 일 년 농사 헛지은 셈이 되는 자들은 안 뺏기려고 발버둥을 쳤다. 성은 이런 이유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우리 올라가는 산길에는 아람이 발에 채이고 있는데.
성을 내려오면서 보니 비봉산이 '목사고을 능주'의
능주목 관아 정문인 죽수절제아문_선조 이전에 세워진 주심포식 건물이다. 능주목은 관할 구역이 7면, 딱 군 정도되는 형세였다.
진산이다. 목사고을이라고 해서 읍세(邑勢)가 얼마나 짱짱했을까 싶어 찾아보니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의 7면이다.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 구씨의 관향(貫鄕)이어서 능성현이던 것을 일약 능주목으로 올렸다는데 형편은 군 정도밖에 안 된다.
유일한 조선시대 건물이라는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을 보자 약간 촌스런 느낌이 든다. 목사고을 관아 정문이라면서 누문(樓門)이 아니라 단층집, 게다가 건물 몸푸에 비해 지붕이 약간 작다. 그래 고개를 갸웃했는데 돌아서며 생각하니 소박한 맛이 좋다.
근래 복원한 장대한 누각 봉서루(鳳棲樓)에 올라가본다. 뒷산이 비봉산이니 당연히 여기에 봉황이 살아야 하리라. 능주 출신의 명유(名儒) 양팽손의 시가 눈길을 끈다. 백아산 아래가 고향인 광주 한솔내과의원 양승호 원장을 만났을 때 "우리 14대조 소쇄원 양산보 님은 조광조의 제자였고 학포 양팽손 님은 친구였다"는 말이 떠올라서다.
'조광조선생 적려(謫廬) 유허지'는 산 밑에 있다. 귀양살이를 했던 초가집을 다시 만들어 놓았는데 안을 보니 여기를 찾아왔던 양팽 손이 조광조와 마주 앉아있다. 둘은 1510년 생원시의 장원과 아 원(亞元)으로서 성균관 동학(同學)이었고 1515년 알성시와 이듬해 식 년시에 나란히 급제했으니 거의 동기뻘이었으며 1519년 기묘사 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유배되자 양팽손이 소두(疏頭)로서 항소했 다. 이 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는 시신을 거두었으며 관작 이 삭탈되자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49년 뒤 조광조는 복권이 되어 보국대광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42년 뒤에는 문묘(文廟)에 종사(宗祀), 성인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동방 18현은 또 거의 다 그의 문인이거나 문하생, 아니면 손제자(孫弟子)들이었는바 그는 이념으로 조선 유교를 제패한 것이었다. 유학을 경전 해석에 그치는 훈고학(訓詁學)이 아 니라 우주의 원리에 대한 해석철학이면서 실천윤리로 띄워올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론과 실천이 다름이 아니게 여겼는바 의병과 독립운동의 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리라.
대곡리 서쪽 효산리에 고인돌 무덤떼가 있다해 찾아가본다. 동남 쪽으로 뻗은 골짜기 양쪽에 277기, 보검재 넘어 춘양면 대신리에 319기 등 596기가 몰려있다. 이들은 2000년에 고창, 강화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하루에 다섯 번 있는 셔틀버스 운행이 끝났다 해 하릴없이 운주사로 향한다. 대초천과 정천을 거슬러 남쪽으로 가는 817번 지방도를 따르다 용강리에서 우회전하니 보인다.
바야흐로 어스름이 깔리는 야산 골짜기의 석탑과 석불들이 아프리카 미술품 같다. 길쭉한 키다리 목각상이나 희화적(戱畵的)인 가면들처럼 황금비율 이런 거 다 팽개치고 저마다의 미감 따라 손 가는 대로 만들어본 품새다. 언덕 위 한 쌍의 와불(臥佛)에 이르니 밤이 되었다. 밤이 되면 부처도 잠을 자야하는가? 건너편 야산 중턱 7층석탑 머리 위의 개천산(497.2m)은 무소의 뿔처럼 번뜩이는데.
운주사 와불을 알현하고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개천산_가운데 봉우리로 무소의 뿔 같은 느낌을 준다. 야산 중턱에 7층석탑이 보인다.
무등산 편백자연휴양림에서 자고 난 이튿날은 환산정(環山亭)부터 찾아본다. 오성산성 가는 길목에 있어 들렀는데 경치가 가히 환상적이다. 장불재 낙타봉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는 동천이 화순천을 만나 서진(西進)하기 전에 꾸며놓은 서성제(瑞城堤)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동산 수풀 속의 정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광취명당(廣聚明堂)의 노송 한 그루가 신선도에서 튀어나온 듯한데 이를 읊은 시는 또 낙하절창(落下絶唱) 남중독보(南中獨步)다.
동산 가운데 소나무 너를 사랑하노매 (愛爾園中松) 밑바탕 뿌리는 늙은 용 같고 (根盤若老龍) 높은 절개는 눈서리를 능가하니 (高節凌霜雪) 부끄러움은 복숭아 자두의 것이어라 (恥爲挑李容)
정자를 지은 이는 류함, 이괄의 난 때 의병을 모집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자년에는 병력을 이끌고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화친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돌아와 환산정을 짓고 절속(絶俗)했다는 이다. 이른바 문무가 다 절륜한 위인. 사나이 생애 이만하면 어디 내놔도 꿀릴 게 없을 것 같다.
서성제 가운데의 환산정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광취명당(廣聚明堂)_사방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널리 모이는 밝은 땅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의병장 유함이 1637년에 지었다.
이서커뮤니티센터에서 열 시에 출발하는 적벽 셔틀버스 시간 때문에 오성산성 오르기를 포기하고 둔병재 넘어 이서면으로 향한다. 다음 소풍 가는 어린이처럼 들뜬 기분이 되어 버스에 오른다. 42년만에 다시 가보게 되는 풍경이다.
구불구불 덜컹덜컹 한참을 가던 버스가 스르르 멈추더니 다들 내려 오른쪽 전망대에 올라보라고 한다. 무심코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라갔더니 와! 보산적벽 위의 망향정, 장항적벽 위의 옹성산(甕城山 573.5m)…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상찬(賞讚)하던 적벽동천(赤壁洞天)이 물 속에 잠겨있다. 그 가운데 새로 지은 망향정은 또 산수절경(山水絶景)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그 옛날 군대 휴가 나와 처음 만났던 망미정(望美亭)은 이제 보니 굉장히 잘 지은 집이다.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으로 가운데 방을 들였는데 전퇴(前退)만이 아니라 후퇴도 있어 전혀 옹삭하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의 의병장이었던 정지준이 세웠으며 정자 이름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아득한 나의 마음이여(渺渺兮余懷) 하늘 저 끝의 임을 그리도다(望美人兮天一方)"의 망미에서 따왔다고 한다.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 대한 충정을 새기며.
망향정은, 망미정이 있는데 이게 왜 또 필요한가가 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일단, 참 잘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블로거 김이박의 표현을 빌면 "근래 지어진 정자 중 이보다 나은 게 있을까 싶을 만큼 튼튼한 결구(結構)에 공교로운 의장(儀裝)이 돋보인다."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간결한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익공(翼工)집인바 연등천장 중도리에 공포를 받친, 드러내지 않은 꾸밈새가 눈길을 끈다.
궁금한 것은 어떤 나무를 어디서 구해 어떻게 가공했길래 이렇게 오래된 집처럼 보이느냐다. 건축가들의 딜레마가 건물에 나이를 입힐 수 없는 점이라는데 이걸 지은 윤창병 목수는 무슨 대단한 비결이 있었던 것 같다. 정자 바로 뒤에 자연암 비탈이 보여 살피다가 정자 전경을 한 장 찍었더니 기둥이 만든 다섯 액자 안에 적벽이 들어와 있다. 이렇게 적벽을 박제해 수몰된 열다섯 마을 사람들 가져가라는 뜻이었나? 전망대에서의 산수절경 화룡점정 느낌이 새삼스레 다시 일어난다.
동복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15개 마을의 실향민들을 위해 지었다는 망향정_윤창병 목수의 작품으로 "근래 지어진 정자 중 이보다 나은 게 있을까 싶을 만큼 튼튼한 결구(結構)에 공교로 운 의장(儀裝)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이서커뮤니티센터로 돌아나와 점심을 먹은 뒤 유명한 수제빵집 빵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사이 동국지도와 만국전도가 있다는 기와집으로 들어가본다. 여암 신경준, 존재 위백규와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꼽힌다는 규남 하백원 기념관이다. 그리고 그가 1810년에 발명했다는 양수기 자승차(自升車), 1811년작 〈동국지도(東國地圖)〉, 1821년에 그린 〈만국전도(萬國全圖)〉를 살펴본다. 그는 성리설에 치우친 세태를 비판하며 농공상고(農工商賈)도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만국전도〉는 지금 우리 중고등학교 교실에 걸려있는 세계지도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양새다. 위아래가 평평하고 가운데 양쪽 이 배가 부른 에케르트도법(圖法)으로 되어있는데 남북아메리카는 물론 베링해협, 남극대륙까지 제자리에 잘 그려져 있다. 경위도선(經緯度線)도 표기되어 있으며 제목은 〈태서회사(泰西會士) 리마두(利瑪竇) 만국전도〉, 리마두라고 했던 마테오리치의 지도를 참조하여 그렸다 밝히고 있다. 실제로는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의 〈직방외기(職方外紀)〉 지도가 모본(母本)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양승호 원장이 소개해준 백아산관광목장의 김인식 선생을 찾아 가니 한 시가 넘었다. 전쟁 났을 때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니 39년 생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얼굴이 팽팽하고 정정하다. 이야기 중간중간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를 정도로 기억력도 좋다. 대화 중에 전남도당사령부는 산 너머 노치마을에 있었다는 말이 나오자 번지수를 잘못 찾았구나 싶어 서둘러 일어선다. 810m나 되는 산 저쪽의 빨치산 본부로 가야하니 마음이 급해서다. 홍하일씨에게 차를 몰고 노치리 백아산자연휴양림에 가있으라 한 뒤 이가경 씨와 산을 오른다. 가파르긴 해도 백아산 명물 하늘다리가 손짓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다. 40분만에 능선 위로 올라왔다.
석회암으로 된 산이라 바위가 흰 거위처럼 보여 백아산(白鵝山)이라 했다는 유래처럼 능선이 온통 회백색 바위로 되어있다. 길은 그 바위 아래로 났는데 중간에 산악회 리본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데 이르니 1개 대대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샘이 나타난다. 광주서중 다니다 입산한 소년 빨치산 박현채도 저 물을 먹었으리라.
조망지로 유명한 마당바위에는 무덤이 있다. 포근한 모습과 달리 토벌대가 빨치산들을 무수히 떨어뜨려 죽였다는 자리다.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66m 길이의 하늘다리가 무서워 가경씨는 아래를 볼 수 없다고 한다. 나도 이제는 집라인 같은 건 안 타는 처지. 왼쪽 골짜기의, 갈색으로 물든 철쭉나무 군락이 장관이다. 내년 여름에 다시 한 번 와봐?
마침내 정상에 도달한다. 오후 4시 50분, 파노라마 사진을 찍는다. 반야봉, 천왕봉, 왕시리봉, 형제봉, 백운산, 억불봉, 조계산, 모후산, 무등산… 사방팔방으로 산·산·산·산뿐이다. 여기가 전라남도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니 전남도당 빨치산들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다섯 시에 하산을 시작한다. 자연휴양림 13호 산막까지 3km, 일몰시간은 여섯 시 10분. 어두워지기 전에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마음이 바쁘다. 문바위 지나 전망대에 이르니 마지막 햇빛이 산꼭대기만 비추고 있다. 반야봉은 구름 목도리를 두르기 시작한다. 백아산과 지리산, 백운산은 서로간에 보여 단파방송이 연결됐다는 김인식 노인의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전남도당 김선우 위원장은 보성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래 이복순이라는 교사 출신 비서가 있었는데 1930년생이었어요. 1952년 2월 지리산에서 체포, 7년형을 언도받고 1959년 12월 25일 석방되었다가 그 때까지 기다려준 옛 애인과 결혼해 2남2녀를 두었답니다. 남편이 광주은행장을 지낸 터라 여유가 있어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갈갱이 선전부와 출판부 자리 땅을 샀는데 관절염이 심해선지 이후로 잘 안 옵디다."
노치(蘆峙)는 갈갱이와 송치(松峙)를 합해 생긴 이름이다. 됫박처럼 생긴 정사각형 땅으로 내수천이 서쪽으로 흘러 동복호로 들어간다. 동·남·북쪽의 곡성 석곡면 염곡리, 동복면 가수리, 백아면 송단리가 하나같이 오지라서 지금도 길은 외통수, 내수천을 따라 나갔다가 15번 국도를 만나야 외지로 갈 수 있다.
가파른 참나무 산비탈, 끝없이 계속되는 계단길 마침내 끝이 보인다. 하일이의 에코 소리도 들린다. 어둡긴 하지만 아직 불을 안 켜도 될 때 길에 내려선다. 2인의 1일 빨치산, 수고했다.
백아산 정상에서의 파노라마_맨 왼쪽의 백운산부터 조계산까지 빨치산 투쟁으로 유명 한 산들이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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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이다. 목사고을이라고 해서 읍세(邑勢)가 얼마나 짱짱했을까 싶어 찾아보니 능주면, 도곡면, 도암면, 춘양면, 청풍면, 이양면, 한천면의 7면이다.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 구씨의 관향(貫鄕)이어서 능성현이던 것을 일약 능주목으로 올렸다는데 형편은 군 정도밖에 안 된다.
유일한 조선시대 건물이라는 죽수절제아문(竹樹節制衙門)을 보자 약간 촌스런 느낌이 든다. 목사고을 관아 정문이라면서 누문(樓門)이 아니라 단층집, 게다가 건물 몸푸에 비해 지붕이 약간 작다. 그래 고개를 갸웃했는데 돌아서며 생각하니 소박한 맛이 좋다.
근래 복원한 장대한 누각 봉서루(鳳棲樓)에 올라가본다. 뒷산이 비봉산이니 당연히 여기에 봉황이 살아야 하리라. 능주 출신의 명유(名儒) 양팽손의 시가 눈길을 끈다. 백아산 아래가 고향인 광주 한솔내과의원 양승호 원장을 만났을 때 "우리 14대조 소쇄원 양산보 님은 조광조의 제자였고 학포 양팽손 님은 친구였다"는 말이 떠올라서다.
'조광조선생 적려(謫廬) 유허지'는 산 밑에 있다. 귀양살이를 했던 초가집을 다시 만들어 놓았는데 안을 보니 여기를 찾아왔던 양팽 손이 조광조와 마주 앉아있다. 둘은 1510년 생원시의 장원과 아 원(亞元)으로서 성균관 동학(同學)이었고 1515년 알성시와 이듬해 식 년시에 나란히 급제했으니 거의 동기뻘이었으며 1519년 기묘사 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유배되자 양팽손이 소두(疏頭)로서 항소했 다. 이 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을 때는 시신을 거두었으며 관작 이 삭탈되자 다시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49년 뒤 조광조는 복권이 되어 보국대광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42년 뒤에는 문묘(文廟)에 종사(宗祀), 성인의 대접을 받게 되었다. 동방 18현은 또 거의 다 그의 문인이거나 문하생, 아니면 손제자(孫弟子)들이었는바 그는 이념으로 조선 유교를 제패한 것이었다. 유학을 경전 해석에 그치는 훈고학(訓詁學)이 아 니라 우주의 원리에 대한 해석철학이면서 실천윤리로 띄워올려 이후 조선의 선비들은 이론과 실천이 다름이 아니게 여겼는바 의병과 독립운동의 뿌리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리라.
대곡리 서쪽 효산리에 고인돌 무덤떼가 있다해 찾아가본다. 동남 쪽으로 뻗은 골짜기 양쪽에 277기, 보검재 넘어 춘양면 대신리에 319기 등 596기가 몰려있다. 이들은 2000년에 고창, 강화의 고인돌군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하루에 다섯 번 있는 셔틀버스 운행이 끝났다 해 하릴없이 운주사로 향한다. 대초천과 정천을 거슬러 남쪽으로 가는 817번 지방도를 따르다 용강리에서 우회전하니 보인다.
바야흐로 어스름이 깔리는 야산 골짜기의 석탑과 석불들이 아프리카 미술품 같다. 길쭉한 키다리 목각상이나 희화적(戱畵的)인 가면들처럼 황금비율 이런 거 다 팽개치고 저마다의 미감 따라 손 가는 대로 만들어본 품새다. 언덕 위 한 쌍의 와불(臥佛)에 이르니 밤이 되었다. 밤이 되면 부처도 잠을 자야하는가? 건너편 야산 중턱 7층석탑 머리 위의 개천산(497.2m)은 무소의 뿔처럼 번뜩이는데.
운주사 와불을 알현하고 내려오는 길에 보이는 개천산_가운데 봉우리로 무소의 뿔 같은 느낌을 준다. 야산 중턱에 7층석탑이 보인다.
무등산 편백자연휴양림에서 자고 난 이튿날은 환산정(環山亭)부터 찾아본다. 오성산성 가는 길목에 있어 들렀는데 경치가 가히 환상적이다. 장불재 낙타봉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는 동천이 화순천을 만나 서진(西進)하기 전에 꾸며놓은 서성제(瑞城堤)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동산 수풀 속의 정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광취명당(廣聚明堂)의 노송 한 그루가 신선도에서 튀어나온 듯한데 이를 읊은 시는 또 낙하절창(落下絶唱) 남중독보(南中獨步)다.
동산 가운데 소나무 너를 사랑하노매 (愛爾園中松) 밑바탕 뿌리는 늙은 용 같고 (根盤若老龍) 높은 절개는 눈서리를 능가하니 (高節凌霜雪) 부끄러움은 복숭아 자두의 것이어라 (恥爲挑李容)
정자를 지은 이는 류함, 이괄의 난 때 의병을 모집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병자년에는 병력을 이끌고 청주까지 올라갔다가 화친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돌아와 환산정을 짓고 절속(絶俗)했다는 이다. 이른바 문무가 다 절륜한 위인. 사나이 생애 이만하면 어디 내놔도 꿀릴 게 없을 것 같다.
서성제 가운데의 환산정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광취명당(廣聚明堂)_사방의 산줄기와 물줄기가 널리 모이는 밝은 땅이라고 한다. 병자호란 의병장 유함이 1637년에 지었다.
이서커뮤니티센터에서 열 시에 출발하는 적벽 셔틀버스 시간 때문에 오성산성 오르기를 포기하고 둔병재 넘어 이서면으로 향한다. 다음 소풍 가는 어린이처럼 들뜬 기분이 되어 버스에 오른다. 42년만에 다시 가보게 되는 풍경이다.
구불구불 덜컹덜컹 한참을 가던 버스가 스르르 멈추더니 다들 내려 오른쪽 전망대에 올라보라고 한다. 무심코 걸음을 옮겨 계단을 올라갔더니 와! 보산적벽 위의 망향정, 장항적벽 위의 옹성산(甕城山 573.5m)… 시인묵객들이 다투어 상찬(賞讚)하던 적벽동천(赤壁洞天)이 물 속에 잠겨있다. 그 가운데 새로 지은 망향정은 또 산수절경(山水絶景)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그 옛날 군대 휴가 나와 처음 만났던 망미정(望美亭)은 이제 보니 굉장히 잘 지은 집이다. 정면 세 칸에 측면 두 칸으로 가운데 방을 들였는데 전퇴(前退)만이 아니라 후퇴도 있어 전혀 옹삭하지 않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양란의 의병장이었던 정지준이 세웠으며 정자 이름은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 "아득한 나의 마음이여(渺渺兮余懷) 하늘 저 끝의 임을 그리도다(望美人兮天一方)"의 망미에서 따왔다고 한다.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에 대한 충정을 새기며.
망향정은, 망미정이 있는데 이게 왜 또 필요한가가 어제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일단, 참 잘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블로거 김이박의 표현을 빌면 "근래 지어진 정자 중 이보다 나은 게 있을까 싶을 만큼 튼튼한 결구(結構)에 공교로운 의장(儀裝)이 돋보인다."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간결한 주심포(柱心包) 양식의 익공(翼工)집인바 연등천장 중도리에 공포를 받친, 드러내지 않은 꾸밈새가 눈길을 끈다.
궁금한 것은 어떤 나무를 어디서 구해 어떻게 가공했길래 이렇게 오래된 집처럼 보이느냐다. 건축가들의 딜레마가 건물에 나이를 입힐 수 없는 점이라는데 이걸 지은 윤창병 목수는 무슨 대단한 비결이 있었던 것 같다. 정자 바로 뒤에 자연암 비탈이 보여 살피다가 정자 전경을 한 장 찍었더니 기둥이 만든 다섯 액자 안에 적벽이 들어와 있다. 이렇게 적벽을 박제해 수몰된 열다섯 마을 사람들 가져가라는 뜻이었나? 전망대에서의 산수절경 화룡점정 느낌이 새삼스레 다시 일어난다.
동복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15개 마을의 실향민들을 위해 지었다는 망향정_윤창병 목수의 작품으로 "근래 지어진 정자 중 이보다 나은 게 있을까 싶을 만큼 튼튼한 결구(結構)에 공교로 운 의장(儀裝)이 돋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이서커뮤니티센터로 돌아나와 점심을 먹은 뒤 유명한 수제빵집 빵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사이 동국지도와 만국전도가 있다는 기와집으로 들어가본다. 여암 신경준, 존재 위백규와 함께 호남의 3대 실학자로 꼽힌다는 규남 하백원 기념관이다. 그리고 그가 1810년에 발명했다는 양수기 자승차(自升車), 1811년작 〈동국지도(東國地圖)〉, 1821년에 그린 〈만국전도(萬國全圖)〉를 살펴본다. 그는 성리설에 치우친 세태를 비판하며 농공상고(農工商賈)도 학문이라고 주장했다.
〈만국전도〉는 지금 우리 중고등학교 교실에 걸려있는 세계지도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양새다. 위아래가 평평하고 가운데 양쪽 이 배가 부른 에케르트도법(圖法)으로 되어있는데 남북아메리카는 물론 베링해협, 남극대륙까지 제자리에 잘 그려져 있다. 경위도선(經緯度線)도 표기되어 있으며 제목은 〈태서회사(泰西會士) 리마두(利瑪竇) 만국전도〉, 리마두라고 했던 마테오리치의 지도를 참조하여 그렸다 밝히고 있다. 실제로는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니의 〈직방외기(職方外紀)〉 지도가 모본(母本)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양승호 원장이 소개해준 백아산관광목장의 김인식 선생을 찾아 가니 한 시가 넘었다. 전쟁 났을 때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니 39년 생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얼굴이 팽팽하고 정정하다. 이야기 중간중간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를 정도로 기억력도 좋다. 대화 중에 전남도당사령부는 산 너머 노치마을에 있었다는 말이 나오자 번지수를 잘못 찾았구나 싶어 서둘러 일어선다. 810m나 되는 산 저쪽의 빨치산 본부로 가야하니 마음이 급해서다. 홍하일씨에게 차를 몰고 노치리 백아산자연휴양림에 가있으라 한 뒤 이가경 씨와 산을 오른다. 가파르긴 해도 백아산 명물 하늘다리가 손짓하고 있으니 어렵지 않다. 40분만에 능선 위로 올라왔다.
석회암으로 된 산이라 바위가 흰 거위처럼 보여 백아산(白鵝山)이라 했다는 유래처럼 능선이 온통 회백색 바위로 되어있다. 길은 그 바위 아래로 났는데 중간에 산악회 리본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데 이르니 1개 대대가 먹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샘이 나타난다. 광주서중 다니다 입산한 소년 빨치산 박현채도 저 물을 먹었으리라.
조망지로 유명한 마당바위에는 무덤이 있다. 포근한 모습과 달리 토벌대가 빨치산들을 무수히 떨어뜨려 죽였다는 자리다.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66m 길이의 하늘다리가 무서워 가경씨는 아래를 볼 수 없다고 한다. 나도 이제는 집라인 같은 건 안 타는 처지. 왼쪽 골짜기의, 갈색으로 물든 철쭉나무 군락이 장관이다. 내년 여름에 다시 한 번 와봐?
마침내 정상에 도달한다. 오후 4시 50분, 파노라마 사진을 찍는다. 반야봉, 천왕봉, 왕시리봉, 형제봉, 백운산, 억불봉, 조계산, 모후산, 무등산… 사방팔방으로 산·산·산·산뿐이다. 여기가 전라남도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니 전남도당 빨치산들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다섯 시에 하산을 시작한다. 자연휴양림 13호 산막까지 3km, 일몰시간은 여섯 시 10분. 어두워지기 전에 거기까지 갈 수 있을까? 마음이 바쁘다. 문바위 지나 전망대에 이르니 마지막 햇빛이 산꼭대기만 비추고 있다. 반야봉은 구름 목도리를 두르기 시작한다. 백아산과 지리산, 백운산은 서로간에 보여 단파방송이 연결됐다는 김인식 노인의 이야기가 되살아난다.
"전남도당 김선우 위원장은 보성사람이었습니다. 그 아래 이복순이라는 교사 출신 비서가 있었는데 1930년생이었어요. 1952년 2월 지리산에서 체포, 7년형을 언도받고 1959년 12월 25일 석방되었다가 그 때까지 기다려준 옛 애인과 결혼해 2남2녀를 두었답니다. 남편이 광주은행장을 지낸 터라 여유가 있어 빨치산 사령부가 있던 갈갱이 선전부와 출판부 자리 땅을 샀는데 관절염이 심해선지 이후로 잘 안 옵디다."
노치(蘆峙)는 갈갱이와 송치(松峙)를 합해 생긴 이름이다. 됫박처럼 생긴 정사각형 땅으로 내수천이 서쪽으로 흘러 동복호로 들어간다. 동·남·북쪽의 곡성 석곡면 염곡리, 동복면 가수리, 백아면 송단리가 하나같이 오지라서 지금도 길은 외통수, 내수천을 따라 나갔다가 15번 국도를 만나야 외지로 갈 수 있다.
가파른 참나무 산비탈, 끝없이 계속되는 계단길 마침내 끝이 보인다. 하일이의 에코 소리도 들린다. 어둡긴 하지만 아직 불을 안 켜도 될 때 길에 내려선다. 2인의 1일 빨치산, 수고했다.
백아산 정상에서의 파노라마_맨 왼쪽의 백운산부터 조계산까지 빨치산 투쟁으로 유명 한 산들이 도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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