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 복용 후 성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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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독고예설영 작성일26-01-24 20:59 조회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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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생활은 개인의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 나이가 들거나 건강 상태에 따라 성기능력이 저하될 수 있으며, 이는 심리적 스트레스와 관계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남성들이 비아그라와 같은 발기부전 치료제를 사용합니다. 비아그라는 효과적으로 발기를 도와 성생활을 개선할 수 있지만, 단순히 약물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비아그라 복용 후 성생활의 만족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추가적인 노력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 글에서는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 성생활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1. 적절한 복용 시간과 용량 준수
비아그라는 일반적으로 성관계 30분에서 1시간 전에 복용합니다. 약물이 체내에 흡수되어 효과를 발휘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복용 후 약 4~5시간 동안 효과가 지속되므로, 이 시간대를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의사와 상담하여 본인에게 적합한 용량을 정확히 지켜야 합니다. 너무 적은 용량은 효과가 미미할 수 있고, 너무 많은 용량은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2. 심리적 안정과 긍정적인 마인드
성생활은 신체적 요소뿐만 아니라 심리적 요소에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비아그라는 발기를 돕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성적 욕구나 심리적 만족감까지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관계 전 긴장을 풀고 파트너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트레스나 불안감은 성적 기능을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명상이나 심호흡 등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3. 파트너와의 원활한 소통
성생활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파트너와의 상호작용입니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에도 파트너와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면 성생활의 만족도는 떨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의 기대치와 욕구를 솔직하게 나누고, 성관계 중에도 서로의 반응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파트너와의 신뢰를 쌓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는 노력이 성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4. 건강한 생활습관 유지
비아그라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규칙적인 운동, 균형 잡힌 식단, 충분한 수면은 전반적인 건강을 증진시키고, 성기능 개선에도 도움을 줍니다. 특히, 유산소 운동은 혈액 순환을 촉진하여 발기 기능을 향상시키는 데 효과적입니다. 또한, 흡연과 과도한 음주는 혈관 건강을 해치고 성기능을 저하시킬 수 있으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5. 성적 판타지와 분위기 조성
성생활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단조로움을 피하고 새로운 자극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에는 파트너와 함께 성적 판타지를 공유하거나, 새로운 포지션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또한, 성관계 전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캔들라이트 디너, 부드러운 음악, 편안한 환경 등은 성적 긴장감을 높이고, 파트너와의 친밀감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6. 부작용 관리와 주의사항
비아그라는 일반적으로 안전한 약물이지만, 일부 사람들에게는 두통, 안면 홍조, 소화불량 등의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작용이 발생할 경우, 약물 복용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거나 의사와 상담하여 대처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비아그라는 질산염 계열의 약물과 함께 복용할 경우 혈압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으므로, 기존에 복용 중인 약물이 있다면 반드시 의사와 상의해야 합니다.
7. 성적 자신감 회복
비아그라는 발기부전으로 인해 잃어버린 성적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물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성적 능력을 점차적으로 되찾아가는 과정을 겪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관계 후 파트너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스스로도 성공적인 경험을 축적해나가면 자연스럽게 자신감이 회복될 것입니다.
8. 정기적인 건강 검진
발기부전은 단순히 성기능의 문제가 아니라, 고혈압, 당뇨병, 심혈관 질환 등과 같은 기저 질환의 신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비아그라를 복용하면서도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통해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저 질환이 있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치료함으로써 성기능 개선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결론
비아그라는 발기부전으로 고민하는 남성들에게 효과적인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약물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성생활의 만족도를 충분히 높이기 어렵습니다. 적절한 복용 방법, 심리적 안정, 파트너와의 소통, 건강한 생활습관, 새로운 시도 등을 통해 비아그라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작용 관리와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통해 안전하게 약물을 사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비아그라를 복용한 후에도 더욱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성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기자 admin@slotnara.info
고인의 빈소. 필자 제공
교사로 재직하던 1974년 투옥 고초 20여일 물고문·전기고문 시달려 언론에 남편 무죄 호소하던 아내는 당국 조사 받고 후유증 등에 삶 포기
82년 출옥 뒤 ‘인혁열사 알리기’ 헌신 민주화운동 단체 행사도 적극 참여 부부, 당진 선산에서 ‘51년 만의 해후’
지난 15일 작고한 황현승 선생은 1934년에 태어나 1954년 당진농고를 졸업할 때까지 스무해 동안 당진에서 살았다. 해양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가로림만과 조금 떨어진 대호지면이 고향인 선 릴박스 생은 어린 시절 철새들의 군무를 바라보면서 넓은 세상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선생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1959년 군 제대 뒤 복학하여 사월혁명을 겪고 난 1961년 졸업하였다. 이후 수원매향여중, 오산중고, 명성여고, 광신상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릴게임온라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공소장에서 황현승을 기소한 내용을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1973년 11월에 김용원, 이창복, 김종대, 유진곤과 회합하여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1973년 12월에 위 4인과 3회 김용원 집에서 만나 회합하고, 1974년에는 2월과 3월에 위 4인에 더해 이수병을 추가하여 회합하고, 4월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 바다이야기2 발행한 유인물을 탐독하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서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
2010년 ‘인혁 열사’ 서도원 선생 묘역에서 헌화하는 고인. 필자 제공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 황금성게임랜드 진 이야기고 2007년에 재심법원에서 무죄까지 받았으니, 두말할 나위 없다. 황 선생은 그 조작 정도가 특히 심했다. 공소 사실에서도 보다시피 사건 발생 4개월 전인 1973년 12월에 가서야 반국가단체에 참가했다는 것이고,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을 했다는 사람이 민청학련 유인물을 사건 발생 후에야 탐독했다고 버젓이 적고 있다. 이런 엉터리 공소 내용을 만들기 야마토게임연타 위해 그들은 황 선생을 5월7일 구속하여 기소가 이루어지기까지 20여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징역 15년형을 내리고 8년을 살게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황 선생은 조사 과정에서 받은 물고문·전기고문으로 평생 심장병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어거지 옥살이를 했지만, 삶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동료들에게 교양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 한다고 ‘영국신사’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가족이 문제였다. 아들 둘과 부인 안보형씨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루아침에 간첩의 부인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부인은 하루하루가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 때 남편의 무죄를 주장하는 지지 광고(1월13일치)를 냈다. 이 일로 공안기관에 연행되어 27시간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1981년이었다.
황 선생은 아내의 비보를 듣고 괴로워하다가 한해 뒤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교직 복귀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공안 기관의 감시는 계속되었으며, 호적에 그어진 빨간 줄로 인해 정상적인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그를 얽매이던 공안기관의 감시가 사라지고, 정상적인 취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구한 일터가 1996년 창간된 식품음료신문이었다. 당시 같이 근무한 김양희씨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일본을 비롯한 해외식품업체들의 최신 정보를 입수해 번역한 내용을 신문에 실었는데, 독자 반응이 아주 좋아 신문사 매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출옥한 다음에도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감옥 동료였던 유진곤(1988년 작고), 김종대(2022년 작고), 이창복과 연을 이어가며 사월혁명회, 범민련, 양심수 후원회, 민자통 등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행사에 참여하며 할 도리를 다했다. 통일뉴스에서는 외신담당 객원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외 진보운동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사형당한 김용원과 이수병을 잊지 못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김용원에 대해서 천재라고 평하면서 그를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견주기도 했다. 물리학자를 꿈꾸던 김용원이 대학 졸업 후 우리나라 사회상을 비판하며 사회운동가로 변모하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며 그의 생애를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1월15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아내 안보형의 시. 이틀 전 남편의 무죄를 호소하는 광고를 동아일보에 낸 아내는 바로 중정에 연행되어 27시간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1975년 1월24일 동아일보에 실린 아내 안보형의 호소문.
2008년 창립한 4·9통일평화재단에서는 1,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를 비롯한 혁신계 인사 50여명에 대한 구술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구술사업 관계자들이 선생에게 인터뷰 신청을 수차례 했다. 하지만 한사코 거부하며 ‘나는 한 일이 없다. 나보다도 더 큰 일을 한 사람이 많은데 내가 나설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수병과 김용원에 관련된 증언은 거부하지 않았다.
부부는 51년 만에 죽어서 해후하였다. 1974년 황현승을 가둔 자들은 가족들의 면회조차 거부했다. 혹시라도 고문한 사실이 밖으로 새나갈까 봐 주의를 한 것이다. 그렇게 1974년 이후 생이별을 했다가 부인이 사망하여 당진 선산에 묻힌 지 44년 만에 남편 황현승이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이창훈/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교사로 재직하던 1974년 투옥 고초 20여일 물고문·전기고문 시달려 언론에 남편 무죄 호소하던 아내는 당국 조사 받고 후유증 등에 삶 포기
82년 출옥 뒤 ‘인혁열사 알리기’ 헌신 민주화운동 단체 행사도 적극 참여 부부, 당진 선산에서 ‘51년 만의 해후’
지난 15일 작고한 황현승 선생은 1934년에 태어나 1954년 당진농고를 졸업할 때까지 스무해 동안 당진에서 살았다. 해양생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가로림만과 조금 떨어진 대호지면이 고향인 선 릴박스 생은 어린 시절 철새들의 군무를 바라보면서 넓은 세상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선생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1974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연루되기 전까지 평범한 삶을 살았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선생은 1959년 군 제대 뒤 복학하여 사월혁명을 겪고 난 1961년 졸업하였다. 이후 수원매향여중, 오산중고, 명성여고, 광신상고 등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릴게임온라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공소장에서 황현승을 기소한 내용을 축약하면 아래와 같다. “1973년 11월에 김용원, 이창복, 김종대, 유진곤과 회합하여 유신정권을 비판하고, 1973년 12월에 위 4인과 3회 김용원 집에서 만나 회합하고, 1974년에는 2월과 3월에 위 4인에 더해 이수병을 추가하여 회합하고, 4월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 바다이야기2 발행한 유인물을 탐독하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으로서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
2010년 ‘인혁 열사’ 서도원 선생 묘역에서 헌화하는 고인. 필자 제공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세간에 널리 알려 황금성게임랜드 진 이야기고 2007년에 재심법원에서 무죄까지 받았으니, 두말할 나위 없다. 황 선생은 그 조작 정도가 특히 심했다. 공소 사실에서도 보다시피 사건 발생 4개월 전인 1973년 12월에 가서야 반국가단체에 참가했다는 것이고, 민청학련의 배후조종을 했다는 사람이 민청학련 유인물을 사건 발생 후에야 탐독했다고 버젓이 적고 있다. 이런 엉터리 공소 내용을 만들기 야마토게임연타 위해 그들은 황 선생을 5월7일 구속하여 기소가 이루어지기까지 20여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징역 15년형을 내리고 8년을 살게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황 선생은 조사 과정에서 받은 물고문·전기고문으로 평생 심장병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렇게 어거지 옥살이를 했지만, 삶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동료들에게 교양이 뛰어나고 영어를 잘 한다고 ‘영국신사’라고 불리었다.
그러나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가족이 문제였다. 아들 둘과 부인 안보형씨는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루아침에 간첩의 부인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부인은 하루하루가 편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 때 남편의 무죄를 주장하는 지지 광고(1월13일치)를 냈다. 이 일로 공안기관에 연행되어 27시간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1981년이었다.
황 선생은 아내의 비보를 듣고 괴로워하다가 한해 뒤인 1982년 형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교직 복귀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공안 기관의 감시는 계속되었으며, 호적에 그어진 빨간 줄로 인해 정상적인 직장을 구하기 어려웠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그를 얽매이던 공안기관의 감시가 사라지고, 정상적인 취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구한 일터가 1996년 창간된 식품음료신문이었다. 당시 같이 근무한 김양희씨 증언에 의하면 ‘선생은 일본을 비롯한 해외식품업체들의 최신 정보를 입수해 번역한 내용을 신문에 실었는데, 독자 반응이 아주 좋아 신문사 매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선생은 출옥한 다음에도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감옥 동료였던 유진곤(1988년 작고), 김종대(2022년 작고), 이창복과 연을 이어가며 사월혁명회, 범민련, 양심수 후원회, 민자통 등 민주화운동 단체들의 행사에 참여하며 할 도리를 다했다. 통일뉴스에서는 외신담당 객원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외 진보운동의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사형당한 김용원과 이수병을 잊지 못했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김용원에 대해서 천재라고 평하면서 그를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견주기도 했다. 물리학자를 꿈꾸던 김용원이 대학 졸업 후 우리나라 사회상을 비판하며 사회운동가로 변모하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수병선생기념사업회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며 그의 생애를 알리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1월15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아내 안보형의 시. 이틀 전 남편의 무죄를 호소하는 광고를 동아일보에 낸 아내는 바로 중정에 연행되어 27시간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1975년 1월24일 동아일보에 실린 아내 안보형의 호소문.
2008년 창립한 4·9통일평화재단에서는 1, 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를 비롯한 혁신계 인사 50여명에 대한 구술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구술사업 관계자들이 선생에게 인터뷰 신청을 수차례 했다. 하지만 한사코 거부하며 ‘나는 한 일이 없다. 나보다도 더 큰 일을 한 사람이 많은데 내가 나설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이수병과 김용원에 관련된 증언은 거부하지 않았다.
부부는 51년 만에 죽어서 해후하였다. 1974년 황현승을 가둔 자들은 가족들의 면회조차 거부했다. 혹시라도 고문한 사실이 밖으로 새나갈까 봐 주의를 한 것이다. 그렇게 1974년 이후 생이별을 했다가 부인이 사망하여 당진 선산에 묻힌 지 44년 만에 남편 황현승이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이창훈/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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