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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를 향해 흘러가는 평창강변 벼랑에 세워진 정자 관란정. 생육신 원호가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를 향해 문안을 드리던 자리에 지은 정자다. 여기서 물길을 따라 10㎞쯤 내려가면 청령포가 나온다. 원호는 과일이며 채소를 편지와 함께 바구니에 담아 띄워 보냈다고 한다.
제천·영월·영주·청주·군위=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억울한 죽임을 당한 단종, 단종 복위에 나섰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보필한 엄흥도 얘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가 뜨자 영월로 바다이야기다운로드 사람들이 몰렸다. 소위 ‘사진발 잘 받는’ 촬영 장소가 아니라, 영화가 다룬 역사 이야기가 여행을 이끄는 모습은 생경하다. 사람들을 영화 밖으로 데리고 나온 건 무엇일까. 단종의 능인 장릉과 유배지 청령포에는 평일에도 차 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밀려든다.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에 지친 읍내 식당은
단체손님을 아예 안 받고 있고,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청령포에는 평일에도 나룻배를 타려는 관광객의 줄이 길다. 숙소도 식당도 예약이 쉽잖아서 여행사들이 패키지 상품 운영을 포기하고 있을 정도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한 장면. 쇼박스 제공
여행자들의 발길은 이제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영월 사람들도 잘 모르는 창절사와 영모전, 민충사까지 닿고 있다. 급기야 금성대군을 따라, 엄흥도를 따라 더 먼 길도 마다 않을 태세다. 단종에서 시작한 길을 더 길게 이어봤다. 진천, 영월, 순흥, 청주, 군위, 문경, 울산…. 오래된 취재수첩을 다시 뒤져가며 그 길을 다시 걸었다.
# 제천에 먼저 들러야 하는 이유
강 온라인야마토게임 원 영월에 가기 전에 충북 제천에 먼저 들른다. 제천시 송학면 장곡리. 제천의 동쪽 끝 벼랑이다. 서강이라 부르는 평창강 물길을 가운데 두고 영월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위아래를 뒤집은 오메가(Ω) 형상으로 굽이쳐 흐르는 강변을 내려다보는 천길 벼랑 끝에 정자 ‘관란정’이 있다.
정자가 이름 삼은 ‘관란(觀瀾)’은 조선 문종 때 집현전 릴게임예시 직제학을 지낸 원호의 호(號)다. 집현전 직제학은 학문 연구를 넘어 국정논의 참여와 간쟁, 탄핵 같은 언론기능까지 하는 자리였다. 권력의 중심부 사정을 손바닥 보듯 알고 있었을 집현전 고위 관료 원호는, 단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자 피바람을 예감했다. 무도(無道)한 세상. 자리를 내놓고 물러나기 직전에 그가 지은 시(詩)가 있다. 문장은 심상찮은 기운으로 가득하다.
“…마음은 어둡고 침침하여 구름은 하늘을 가득히 덮었구나/…/세상 사람 모두가 의(義)를 저버리고 녹(祿)을 따르니/나 홀로 몸을 더럽히지 않고 깨끗하게 헤맨다네.”
시의 제목이 ‘탄세사(嘆世詞)’다. ‘세상(世)을 탄식(嘆)하는 노래(詞)’란 뜻이다.
집현전을 나와 고향 원주에서 두문불출하던 원호는, 단종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됐다는 소식을 듣곤 청령포 서쪽 상류의 벼랑에다 단(壇)을 세운다. 여기서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문안했다. 함지박에 직접 농사지어 거둔 채소와 과일을 편지와 함께 담아 수시로 강물에 띄워 보내기도 했다.
관란정은 훌륭한 경관이 의미를 완벽하게 압도하는 곳이다. 관란정 일대의 풍경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낸 영화 속 청령포 풍경에 뒤지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보다 더 영화적인 공간이다. 정자 곁의 벼랑 끝에 서면 평창강 일대의 모든 것들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부감 샷을 찍는 지미집 카메라, 혹은 드론의 시선이다. ‘여행은 풍경’이라고 믿는, 역사와 영화 이야기를 길잡이로 세운 게 못 미더운 사람들에게도 자신만만하게 권할 수 있다.
영주 순흥 금성대군신단 옆의 은행나무. 단종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순흥에 피바람이 불자 말라 죽었다가 단종이 복권되고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원호는 왜 동쪽으로 머리를 뒀을까
단종이 세상을 뜨자 원호는 백덕산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고는 원주로 돌아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문밖출입을 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앉을 때나 누울 때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거나 머리를 두었으니 단종의 묘가 자기 집 동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원호는 그렇게 살다 죽었다.
원호가 단을 세운 자리에 1845년 그의 행적을 기리는 유허비와 함께 정자 관란정이 세워졌다. 그가 죽은 지 38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 정조 때 이조·공조·예조판서를 두루 거친 홍양호가 지은 원호의 유허비 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처음에 기미를 아는 것은 그래도 미칠(及)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절개를 다하는 것은 기록이 없어져 자취가 없으니 알기 어려운 일이다.”
홍양호는 틀렸다. 유허비가 없다 해도, 관란정이 세워지지 않았다 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종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들의 억울한 죽음은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으로 공유되고 있다. 글이 되고, 그림이 되고, 종교가 되고, 또 영화로 변주되면서 애달픈 주검의 슬픔은 공명(共鳴)한다.
기세등등한 권력에 등을 돌린다는 건, 왕조의 시대에는 기회를 도모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곧 ‘세상을 버린다’는 뜻이었다. 원호만이 아니었다.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 더 있었다.
전북 임실에는 ‘노산(魯山)’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높지도, 산세가 비범하지도 않은 평범한 산이다. 그런데 단종의 죽음에 즈음해 이 산 주변으로 낙향한 가문이 열다섯이나 된다. 비밀은 산 이름에 있었다.
노산. 단종이 유배 후 강등됐던 봉작명인 노산군(魯山君)의 노산과 한자가 같다. 세상을 등지고 거처를 찾던 이들이 지명을 뒤지다가 ‘노산’이란 이름을 찾아내곤 아무 연고 없는 전북 임실의 노산 아래로 내려와 거처로 삼았다는 얘기다.
노산 아래 현풍곽씨의 제각 ‘귀로재(歸路齋)’ 기문(記文)에 그 얘기가 나온다. “노산(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는 날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노산 아래 내려가서 노재를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그야말로 명분에 죽고 사는 선비들은 살아 있는 왕을 인정하지 않고, 폐위된 왕의 이름에 기대어 숨었다.
순흥의 누각 봉서루(鳳棲樓).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 누각 앞에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바위를 가져다 놓았다.
# 영화가 왜, 영월에 가게 만드는가
이제 강원 영월로 가보자. 영월 청령포와 장릉은 권하지 않아도 갈 것이고 설명하지 않아도 익히 알려진 곳이니 그 얘기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잘 안 알려진 몇 곳을 짚는다.
영월 읍내에는 영모전(永慕殿)이 있다. 본래 마을의 서낭당이자 주민들의 기도처였던 성황사였다. 그러다 1927년 서낭당에 모셔져 있던 목상을 불태우고, 대신 백마를 탄 단종이 충신 추익한이 바치는 산머루와 다래를 받는 영정을 걸고 편액을 ‘영모전’이라 바꿔 달았다. 성황신을 모시던 서낭당이 단종을 모시는 사당이 된 것이었다. 거듭 생각할수록 상징적인 대목이다.
조정이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킨 건 1698년이다. 그런데 영월의 민간은 그보다 훨씬 일찍 단종을 신(神)으로 모셨다. 제도가 하지 못한 일을 백성들이 먼저 했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됐다는 이야기는 조정의 공식 복위와 무관하게 파다했다. 지금도 태백 일대의 무속인들이 섬기는 태백산신 ‘아기대왕’이 단종이다. 왕으로 복위되기도 전에, 민간이 먼저 그를 왕으로 모신 것이다.
낙화암 하면 부여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영월에도 낙화암이 있다. 단종이 숨을 거둔 뒤 단종을 보위하던 궁녀와 시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강물로 투신했다는 곳이다. 금강정 뒤쪽 민충사(愍忠祠)는 그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름 없이 따라 죽은 이들을 모시고 있다.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건 1455년이다. 571년 전 일이다.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뜨겁다. 왜 하필 단종일까. 우리는 이겨서 영광을 누린 자보다, 지고 핍박받고 억울하게 죽은 자에게 더 공감한다. 사람들을 이곳 영월까지 끌고 온 건 어린 단종의 억울한 죽음이 남긴 여운이다.
# 억울한 죽음이 또 있었다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세종의 아들은 둘이었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다. 칼을 잡은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은 셋째, 금성대군은 여섯째 아들이었다.
먼저 죽은 건 안평대군이었다.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다는 그 안평대군이다. 1453년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 당일에 체포돼 강화도로 유배됐다. 두루 역량을 인정받던 그는 수양에게는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였다. 속전속결이었다. 강화도로 쫓겨간 안평대군은 8일 뒤에 사약을 받았다. 서른다섯이었다.
비극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함께 유배된 아들 의춘군은 진도로 옮겨진 뒤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관청의 노비가 됐다. 재산은 몰수돼 공신들에게 나누어졌다. 역모의 혐의였으니 가족 누구도 죽어서 묘를 쓰지 못했다. 제사 지낼 후손은커녕, 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안평대군은 완벽하게 지워졌다.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이 복권되고, 금성대군이 복권되고 나서도 한참 뒤인 1747년에야 안평대군은 복권됐다. 죽은 지 약 300년 만이었다. 그런데 복권은 됐어도 제사 지낼 후손이 없었다. 그 사정은 영조의 특명으로 이어졌다.
# 영조의 어명을 260년 동안 지키다
영조가 금성대군 후손을 불러 교지와 함께 특명을 내렸다. 금성대군의 종손을 안평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정하라는 것이었다. 봉사손이란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이다. 금성대군 종손에게 대가 끊긴 삼촌 안평대군 제사를 모시라는 어명이었다.
어명을 지키려면 금성대군 문중의 종손이 안평대군의 봉사손으로 가야 했다. 종가는 종손 대신 작은집에서 온 양자가 계보를 이어야 했다. 게다가 금성대군이 죽고 노비로 신분이 떨어진 후손들은 경제적 형편도 궁핍했다. 그런데도 영조의 어명은 260년 넘게 지켜졌다.
지금 안평대군 시제는 봉사손이 아니라 금성대군 가문에서 모신다. 청주에서 만난 안평대군 봉사손 이양희(82) 씨의 설명이 이렇다. “그동안 봉사손이 방안 제사를 지내오다가 안평대군이 세상을 뜬 지 555년이 되던 해인 2008년에 안평대군신단을 만들고 금성대군 종손이 제를 지내는 것으로 법도를 바꿨어요.” 이 씨는 “집안 제사도 안 지내는 세태 속에서 봉사손의 제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서 내린 결단”이라고 했다.
구 군위의 엄흥도 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영월의 묘가 아니라 이곳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도로에서 멀지 않은 산속인데도 유난히 깊은 느낌이다. 봄비가 내린 날인데도 눈이 쌓여 있었다.
# 눈으로 뒤덮인 금성대군제단
금성대군은 묘가 없다. 대신 위패를 모신다. 충북 진천 용기리 수의마을에 금성대군 위패를 모신 사우인 ‘청당사’가 있다. 금성대군 증손자가 터를 잡은 자리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청주 북이면에는 안평대군과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 세종대왕의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죽계서원’이 있다.
금성대군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라면 두 곳 모두 가볼 만한데, 여기보다 더 추천하는 곳이 청주 미원면의 ‘금성대군제단’이다. 이 제단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숨진 자리에 세웠다는 경북 영주 순흥면의 금성대군신단과는 별개다. 여기 청주의 제단은 부인 최 씨의 묘 옆에 봉분의 형태로 있다. 워낙 깊고 인적 없는 자리다.
찾아간 날, 비가 왔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는데 산속에서는 비가 눈이 됐다. 제단의 봉분 위로 눈이 쌓였다. 그 주위를 눈을 이고 선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진공처럼 적막한 풍경이었다.
왜 이리 깊은 곳에 제단을 세웠을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금성대군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쯤 지나 증손자가 영주에서 유품을 챙겨 진천으로 돌아오는 길, 증손자가 “대군 할아버지, 따라오십니까”라 물으면 “가고 말고, 가고 말고…”란 답이 돌아왔는데, 이곳을 지날 때는 물어도 답이 없었단다. 그래서 이곳이 금성대군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됐다는 얘기다. 설화다. 이 산속에서 설화가 생겨났다.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눈 덮인 봉분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충북 청주 미원면의 금성대군제단. 금성대군 부인 최 씨의 묘 옆에 만들었다.
# 엄흥도 묘는 어디에 있을까
이제 엄흥도 얘기다. 영화가 보여주는 엄흥도는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는 장면까지다. 그 뒤에 엄흥도는 어디로 갔을까.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흥도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린 상황에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 지냈다. 그리고 영월을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 기록이 없다. 그의 존재가 공식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단종이 죽고 60년 가까이 지난 1516년(중종 11년)이다. 어명으로 단종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러 갔던 우승지 신창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 처음 나온다. “고을 아전으로 이름이 엄흥도라는 자가 곡(哭)하며 관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단 한 줄이었다.
엄흥도의 묘라고 주장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영월 팔괴리와 대구 군위다. 묘가 둘일 수는 없다. 하나는 가짜다. 영월 땅에서 대역죄인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부지하며 살다 묻혔을 가능성은 낮다. 영월의 묘는 가묘(假墓)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다.
군위에도 엄흥도의 묘가 있다.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조림산 기슭이다. 도로 옆에 주차장이 있고, 나무 덱을 딛고 오르면 묘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단종의 죽음을 수습한 뒤 엄흥도의 세 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큰아들은 경북 문경에, 둘째 아들은 엄흥도와 함께 군위 화본리로, 막내는 강원 안변으로 갔다.
엄흥도가 군위로 왔고, 군위의 묘가 진짜 엄흥도 묘라는 건 둘째 아들 가문의 주장이다. 몇 가지 근거가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 “엄흥도의 후손이 영남에 있다 하니…”라는 대목이 있다는 것. 엄흥도와 단종의 시신을 함께 수습한 정사종이 군위 현감을 지냈다는 것도 정황에 들어맞는다. 결정적인 건 1733년 영조가 직접 ‘군위 문중이 엄흥도의 후손임을 인정한다’는 정교와 함께 후손의 군역과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내린 문서다.
엄흥도 묘 앞에는 작은 봉분이 두 개 있다. 혹시 파헤쳐져 부관참시 될 것에 대비해 가짜 봉분을 앞에 세운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숨었고, 죽어 묻혀서도 들킬까 봐 숨어야 했던 삶. 단종의 시신을 정성껏 거두었지만, 정작 엄흥도는 자신의 무덤을 논란 속에 남겨두고 떠났다.
■ 20년 전에는 ‘라디오스타’
지금은 ‘왕과 사는 남자’지만, 20년 전에도 여행자를 영월로 이끌었던 영화가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영화 ‘라디오스타’다.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이 영화는 한물간 왕년의 가수와 그를 뒷바라지해주던 매니저 얘기다. 정상의 인기를 누리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선 주인공의 삶은, 12만 명까지 인구가 늘었다가 4만 명으로 줄어든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 영월의 처지와 닮았다. 영화 흥행 기록은 200만 명이 채 안 됐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박경일 기자
제천·영월·영주·청주·군위=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2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억울한 죽임을 당한 단종, 단종 복위에 나섰다가 죽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보필한 엄흥도 얘기를 다룬 영화다. 영화가 뜨자 영월로 바다이야기다운로드 사람들이 몰렸다. 소위 ‘사진발 잘 받는’ 촬영 장소가 아니라, 영화가 다룬 역사 이야기가 여행을 이끄는 모습은 생경하다. 사람들을 영화 밖으로 데리고 나온 건 무엇일까. 단종의 능인 장릉과 유배지 청령포에는 평일에도 차 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관광객이 밀려든다. 쏟아져 들어오는 손님에 지친 읍내 식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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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호가 단을 세운 자리에 1845년 그의 행적을 기리는 유허비와 함께 정자 관란정이 세워졌다. 그가 죽은 지 38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조선 정조 때 이조·공조·예조판서를 두루 거친 홍양호가 지은 원호의 유허비 문장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처음에 기미를 아는 것은 그래도 미칠(及) 수 있지만, 마지막까지 절개를 다하는 것은 기록이 없어져 자취가 없으니 알기 어려운 일이다.”
홍양호는 틀렸다. 유허비가 없다 해도, 관란정이 세워지지 않았다 해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종과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들의 억울한 죽음은 시대를 뛰어넘어 기억으로 공유되고 있다. 글이 되고, 그림이 되고, 종교가 되고, 또 영화로 변주되면서 애달픈 주검의 슬픔은 공명(共鳴)한다.
기세등등한 권력에 등을 돌린다는 건, 왕조의 시대에는 기회를 도모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곧 ‘세상을 버린다’는 뜻이었다. 원호만이 아니었다. 세상을 버린 사람들이 더 있었다.
전북 임실에는 ‘노산(魯山)’이라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높지도, 산세가 비범하지도 않은 평범한 산이다. 그런데 단종의 죽음에 즈음해 이 산 주변으로 낙향한 가문이 열다섯이나 된다. 비밀은 산 이름에 있었다.
노산. 단종이 유배 후 강등됐던 봉작명인 노산군(魯山君)의 노산과 한자가 같다. 세상을 등지고 거처를 찾던 이들이 지명을 뒤지다가 ‘노산’이란 이름을 찾아내곤 아무 연고 없는 전북 임실의 노산 아래로 내려와 거처로 삼았다는 얘기다.
노산 아래 현풍곽씨의 제각 ‘귀로재(歸路齋)’ 기문(記文)에 그 얘기가 나온다. “노산(단종)이 왕위를 빼앗기는 날을 당해 벼슬을 버리고 노산 아래 내려가서 노재를 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그야말로 명분에 죽고 사는 선비들은 살아 있는 왕을 인정하지 않고, 폐위된 왕의 이름에 기대어 숨었다.
순흥의 누각 봉서루(鳳棲樓).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이다. 누각 앞에 봉황의 알을 상징하는 바위를 가져다 놓았다.
# 영화가 왜, 영월에 가게 만드는가
이제 강원 영월로 가보자. 영월 청령포와 장릉은 권하지 않아도 갈 것이고 설명하지 않아도 익히 알려진 곳이니 그 얘기는 따로 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잘 안 알려진 몇 곳을 짚는다.
영월 읍내에는 영모전(永慕殿)이 있다. 본래 마을의 서낭당이자 주민들의 기도처였던 성황사였다. 그러다 1927년 서낭당에 모셔져 있던 목상을 불태우고, 대신 백마를 탄 단종이 충신 추익한이 바치는 산머루와 다래를 받는 영정을 걸고 편액을 ‘영모전’이라 바꿔 달았다. 성황신을 모시던 서낭당이 단종을 모시는 사당이 된 것이었다. 거듭 생각할수록 상징적인 대목이다.
조정이 단종을 왕으로 복위시킨 건 1698년이다. 그런데 영월의 민간은 그보다 훨씬 일찍 단종을 신(神)으로 모셨다. 제도가 하지 못한 일을 백성들이 먼저 했다. 억울하게 죽은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됐다는 이야기는 조정의 공식 복위와 무관하게 파다했다. 지금도 태백 일대의 무속인들이 섬기는 태백산신 ‘아기대왕’이 단종이다. 왕으로 복위되기도 전에, 민간이 먼저 그를 왕으로 모신 것이다.
낙화암 하면 부여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영월에도 낙화암이 있다. 단종이 숨을 거둔 뒤 단종을 보위하던 궁녀와 시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강물로 투신했다는 곳이다. 금강정 뒤쪽 민충사(愍忠祠)는 그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이름 없이 따라 죽은 이들을 모시고 있다.
세조가 왕위를 빼앗은 건 1455년이다. 571년 전 일이다.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뜨겁다. 왜 하필 단종일까. 우리는 이겨서 영광을 누린 자보다, 지고 핍박받고 억울하게 죽은 자에게 더 공감한다. 사람들을 이곳 영월까지 끌고 온 건 어린 단종의 억울한 죽음이 남긴 여운이다.
# 억울한 죽음이 또 있었다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 사건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세종의 아들은 둘이었다.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다. 칼을 잡은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은 셋째, 금성대군은 여섯째 아들이었다.
먼저 죽은 건 안평대군이었다. 안견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했다는 그 안평대군이다. 1453년 음력 10월 10일, 계유정난 당일에 체포돼 강화도로 유배됐다. 두루 역량을 인정받던 그는 수양에게는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였다. 속전속결이었다. 강화도로 쫓겨간 안평대군은 8일 뒤에 사약을 받았다. 서른다섯이었다.
비극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함께 유배된 아들 의춘군은 진도로 옮겨진 뒤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관청의 노비가 됐다. 재산은 몰수돼 공신들에게 나누어졌다. 역모의 혐의였으니 가족 누구도 죽어서 묘를 쓰지 못했다. 제사 지낼 후손은커녕, 묘 하나 남기지 못했다.
그렇게 안평대군은 완벽하게 지워졌다. 단종이 복위되고, 사육신이 복권되고, 금성대군이 복권되고 나서도 한참 뒤인 1747년에야 안평대군은 복권됐다. 죽은 지 약 300년 만이었다. 그런데 복권은 됐어도 제사 지낼 후손이 없었다. 그 사정은 영조의 특명으로 이어졌다.
# 영조의 어명을 260년 동안 지키다
영조가 금성대군 후손을 불러 교지와 함께 특명을 내렸다. 금성대군의 종손을 안평대군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정하라는 것이었다. 봉사손이란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이다. 금성대군 종손에게 대가 끊긴 삼촌 안평대군 제사를 모시라는 어명이었다.
어명을 지키려면 금성대군 문중의 종손이 안평대군의 봉사손으로 가야 했다. 종가는 종손 대신 작은집에서 온 양자가 계보를 이어야 했다. 게다가 금성대군이 죽고 노비로 신분이 떨어진 후손들은 경제적 형편도 궁핍했다. 그런데도 영조의 어명은 260년 넘게 지켜졌다.
지금 안평대군 시제는 봉사손이 아니라 금성대군 가문에서 모신다. 청주에서 만난 안평대군 봉사손 이양희(82) 씨의 설명이 이렇다. “그동안 봉사손이 방안 제사를 지내오다가 안평대군이 세상을 뜬 지 555년이 되던 해인 2008년에 안평대군신단을 만들고 금성대군 종손이 제를 지내는 것으로 법도를 바꿨어요.” 이 씨는 “집안 제사도 안 지내는 세태 속에서 봉사손의 제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몰라서 내린 결단”이라고 했다.
구 군위의 엄흥도 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영월의 묘가 아니라 이곳이 진짜일 가능성이 높다. 도로에서 멀지 않은 산속인데도 유난히 깊은 느낌이다. 봄비가 내린 날인데도 눈이 쌓여 있었다.
# 눈으로 뒤덮인 금성대군제단
금성대군은 묘가 없다. 대신 위패를 모신다. 충북 진천 용기리 수의마을에 금성대군 위패를 모신 사우인 ‘청당사’가 있다. 금성대군 증손자가 터를 잡은 자리다.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청주 북이면에는 안평대군과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 등 세종대왕의 아들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죽계서원’이 있다.
금성대군의 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라면 두 곳 모두 가볼 만한데, 여기보다 더 추천하는 곳이 청주 미원면의 ‘금성대군제단’이다. 이 제단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숨진 자리에 세웠다는 경북 영주 순흥면의 금성대군신단과는 별개다. 여기 청주의 제단은 부인 최 씨의 묘 옆에 봉분의 형태로 있다. 워낙 깊고 인적 없는 자리다.
찾아간 날, 비가 왔다. 봄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는데 산속에서는 비가 눈이 됐다. 제단의 봉분 위로 눈이 쌓였다. 그 주위를 눈을 이고 선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섰다. 진공처럼 적막한 풍경이었다.
왜 이리 깊은 곳에 제단을 세웠을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금성대군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쯤 지나 증손자가 영주에서 유품을 챙겨 진천으로 돌아오는 길, 증손자가 “대군 할아버지, 따라오십니까”라 물으면 “가고 말고, 가고 말고…”란 답이 돌아왔는데, 이곳을 지날 때는 물어도 답이 없었단다. 그래서 이곳이 금성대군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됐다는 얘기다. 설화다. 이 산속에서 설화가 생겨났다. 억울한 죽음을 기리는 눈 덮인 봉분 앞에서 그 이야기를 들으니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충북 청주 미원면의 금성대군제단. 금성대군 부인 최 씨의 묘 옆에 만들었다.
# 엄흥도 묘는 어디에 있을까
이제 엄흥도 얘기다. 영화가 보여주는 엄흥도는 단종의 주검을 수습하는 장면까지다. 그 뒤에 엄흥도는 어디로 갔을까.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흥도는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린 상황에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 지냈다. 그리고 영월을 떠났다. 어디로 갔는지 기록이 없다. 그의 존재가 공식 문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단종이 죽고 60년 가까이 지난 1516년(중종 11년)이다. 어명으로 단종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러 갔던 우승지 신창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 처음 나온다. “고을 아전으로 이름이 엄흥도라는 자가 곡(哭)하며 관을 갖추어 장사 지냈다고 합니다.” 단 한 줄이었다.
엄흥도의 묘라고 주장하는 곳이 두 군데 있다. 영월 팔괴리와 대구 군위다. 묘가 둘일 수는 없다. 하나는 가짜다. 영월 땅에서 대역죄인이었던 엄흥도가 목숨을 부지하며 살다 묻혔을 가능성은 낮다. 영월의 묘는 가묘(假墓)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이유다.
군위에도 엄흥도의 묘가 있다. 대구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 조림산 기슭이다. 도로 옆에 주차장이 있고, 나무 덱을 딛고 오르면 묘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단종의 죽음을 수습한 뒤 엄흥도의 세 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큰아들은 경북 문경에, 둘째 아들은 엄흥도와 함께 군위 화본리로, 막내는 강원 안변으로 갔다.
엄흥도가 군위로 왔고, 군위의 묘가 진짜 엄흥도 묘라는 건 둘째 아들 가문의 주장이다. 몇 가지 근거가 있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영조 편에 “엄흥도의 후손이 영남에 있다 하니…”라는 대목이 있다는 것. 엄흥도와 단종의 시신을 함께 수습한 정사종이 군위 현감을 지냈다는 것도 정황에 들어맞는다. 결정적인 건 1733년 영조가 직접 ‘군위 문중이 엄흥도의 후손임을 인정한다’는 정교와 함께 후손의 군역과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내린 문서다.
엄흥도 묘 앞에는 작은 봉분이 두 개 있다. 혹시 파헤쳐져 부관참시 될 것에 대비해 가짜 봉분을 앞에 세운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숨었고, 죽어 묻혀서도 들킬까 봐 숨어야 했던 삶. 단종의 시신을 정성껏 거두었지만, 정작 엄흥도는 자신의 무덤을 논란 속에 남겨두고 떠났다.
■ 20년 전에는 ‘라디오스타’
지금은 ‘왕과 사는 남자’지만, 20년 전에도 여행자를 영월로 이끌었던 영화가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영화 ‘라디오스타’다. 안성기, 박중훈 주연의 이 영화는 한물간 왕년의 가수와 그를 뒷바라지해주던 매니저 얘기다. 정상의 인기를 누리다가 내리막길로 들어선 주인공의 삶은, 12만 명까지 인구가 늘었다가 4만 명으로 줄어든 쇠락해가는 지방 도시 영월의 처지와 닮았다. 영화 흥행 기록은 200만 명이 채 안 됐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공간을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박경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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