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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가 지난 2005년 서울의 한 화랑에서 달마도 그림 전시회를 열었을 때의 모습. 그는 세상의 시비에 휘말려 곤궁해진 심신을 그림과 글씨로 다스렸다. 왼쪽 사진은 그 시비의 한 원인이었던 칼럼이 실린 신문 지면 사본. 연합뉴스
“제 대학 시절 가까운 친구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신화적인 거리로 존재하고 있던 시인 김지하를 ‘지하 형, 지하 형’ 하고 부를 때마다 저는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는데, 1980년대 초였을까요? 어느 술집의 젊은 마담도 ‘지하 형’이라고 하질 않나, 골드몽릴게임 우연한 자리에 한 번은 가수 조용필 씨를 만났는데 그이도 ‘지하 형’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시인 황지우가 이렇게 되돌아봤다. 1998년 나온 책 ‘김지하의 사상기행 2’ 대담에서였다. 김지하(1941∼2022)가 웃었다. “나중에는 아들뻘 되는 새파란 대학생들도 지하 형이라 하데.”
실제로 1980년대 대학가에선 그를 본 10원야마토게임 적도 없는 새파란 운동권 학생들이 ‘지하 형’을 읊조리곤 했다. 앞 세대 민주화 투쟁의 신화적 인물을 근친화하며 동지의 자부를 누리려는 호칭이었다.
1973년 김수환(오른쪽) 추기경이 주례를 선 김지하 결혼식 사진. 쿨투라 제공
사이다쿨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인
알려진 것처럼 김지하는 박정희 정권에서 반정부 운동 혐의로 세 번 투옥됐다. 1974년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필화로 재차 구속돼 독방에서 5년 9개월을 복역했다. 그 사이에 권력자들의 부패를 통렬히 풍자한 담시 ‘오적(五敵)’을 발표하고, 시집 ‘황 릴게임예시 톳길’을 펴냈다. 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구전됐으며 1980년대에 곡이 붙어 민중가요로 불렸다.
그가 한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자, 일본에서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시집을 출판하고 ‘김지하 구출 국제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는 197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됐다. 같은 해 감옥에서 아 골드몽 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다. 1981년엔 세계시인대회의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했다. 한국이 문화 변방이었을 때, 세계 무대에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알린 문인이었다.
그 아우라가 커서였을까, 2000년대 이후 기자로 김지하를 몇 차례 만났는데 그의 박람강기에 입을 벌리곤 했다. 얼음에 박 밀듯 쏟아내는 언설에 늘 어찔했다. 그는 거장들이 흔히 그러듯 세상의 예법에 무심했다. 2005년 그의 장모인 박경리(1926∼2008) 소설가의 팔순 잔치에서 조우했을 때, 그는 휴대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하더니 누군가와 10여 분 통화를 한 후 고맙다는 말도 없이 휘적휘적 자기 길을 갔다.
그 몇 달 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문예지들이 내게 청탁을 하지 않는다. 문예지들이 패거리에 의해 움직이는데, 내게는 패거리가 없잖은가.”
그는 문학판을 지배하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고 여겼다. 자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생명운동파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1970년대에 이미 감옥에서 생명이라는 화두를 발견했다고 말하곤 했다. 흙먼지 쌓인 철창 사이 홈에 풀씨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본 후 눈물을 흘리며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힘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수운 최제우의 동학(東學)을 공부하고 불교, 노장학, 생태주의 철학사상 등을 궁구함으로써 자신만의 생명사상 기틀을 다졌다.
출옥 후인 1982년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을 작성해서 지인들에게 보여줬다. “죽음의 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국지적 반정부 운동을 넘어서 지구 차원의 문명 전환을 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때까지도 문학계에서는 그를 여전히 저항시인의 자리에 두고 있었다. 출판사 창작과비평이 1984년, 1985년 민중시인 시선집에 그를 포함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김지하는 반체제 진영과의 동행 보다 생명운동의 길을 여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반생명의 문명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세상, 즉 후천개벽을 이루자는 게 그 일의 고갱이였다. 반전 평화·환경 생태보존·생활협동조합 운동이 실천 세목이었다.
운동권 내부에서 “지하 형이 좀 이상해졌다”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군사정권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할 때 웬 생명이냐는 불만이 슬금슬금 새어나왔다. 그것은 마침내 ‘변절자’라는 욕설에까지 다다르게 됐다.
그 직접적 계기는 김지하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게재한 칼럼이었다.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 이런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글이었다. 그해 봄 명지대 학생 강경대 사망 사건 이후 연쇄적으로 일어났던 시국 관련 분신, 투신을 중지하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나무위키는 이 글 원제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는데 “조선일보 쪽에서 보다 자극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문사는 원제를 지면 제목으로 하고, 부제 중 하나로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를 넣었다. 그게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면 부제를 잘 뽑은 것이다. 글의 맨 앞과 끝부분에서 그 내용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1980년대 초반 박경리 작가가 손자(김지하 아들)를 업고 있는 모습. 고 김일주 작가 촬영
◇“민주화 투사가 어떻게…”
이 글은 반정부 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민주화 투사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민족문학작가회의(민작)는 김지하를 제명했다. 칼럼이 발표된 지 나흘 후였다. 민작은 1974년 사형 선고를 받은 김지하를 구명하려는 문인들이 만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후신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그 글을 계기로 운동권을 강력 비판하며 궁지에 몰렸던 정국을 반전시켰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정원식 총리 임명자 밀가루 세례 사건 등이 그 수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지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부인 김영주(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1946∼2019)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협박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김지하의 글은 죽음의 행렬을 부추기는 배후가 있다는 것을 은유적이면서도 격렬한 어조로 암시한다. 운동권은 터무니없는 음모론적 시각이라며 분노했다. 이 ‘배후론’ 혹은 ‘음모론’은 김지하 자신의 경험과 관련돼 있다. 감옥에 있을 때 바깥의 동지들이 그에게 더 극렬한 반정부 문건을 쓰도록 요구했는데, 정권을 자극해 그를 죽이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그 동력으로 체제를 엎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탓이다. 이와 관련, 부인 김영주는 “그 세력은 김지하를 구하려는 나와 엄마(박경리)도 죽이려 했다”라며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 말한 바 있다. 박경리는 “나는 이 악을 누구에게 말할까, 그냥 안고 가야겠다”라고 글에 썼다.
◇“사망자 13명 비이성적 상황”
김지하는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자신에게 변절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때 동지였던 이들의 돌팔매질과 집단 따돌림이 괴로워서 매일 집에서 소주만 들이켰다. 그 과정에서 감옥 독방에서 얻은 정신 분열이 더 심각해졌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운동권에선 그가 병증이 심해서 죽음의 굿판 같은 헛소리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사실 김지하는 그 글을 쓰기 3개월 전인 2월 17일 동아일보 특별기고를 통해 정신 분열증을 고백했다. 정신병원에 두 번 입원해서 치료받은 사실을 숨겨 왔으나 이제 분명히 밝히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여인들의 몸에 임신을 시켰다가 낙태를 겪게 한 세 번의 경험도 털어놨다. 생명성 회복을 위한 사회적 고백 운동에 나서고자 하는 뜻에서 스스로 먼저 참회한 것이었다. 이런 그에게 그해 3월에서 5월까지 시국 관련 분신, 투신 등 사망자가 13명에 이른 상황이 예사롭게 보였겠는가.
작년에 ‘회성록(回省錄)’을 출간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그해 봄의 상황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그 행렬에 어떤 비이성적인 충동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분명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에 변혁운동가를 꿈꿨던 김명인이 김지하 글의 취지를 뒤늦게나마 인정한 셈이다. 그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낯선 ‘생명사상’류의 논조가 버성기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선 그 글을 이 시점에 다시 읽으면 절박함을 느낄 듯싶다. 생명이 경시되는 쪽으로 마구 치닫는 세상에 대한 경고음으로. 김지하는 이렇게 썼다. “한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크다. 이것이 모든 참된 운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하편에 계속> 전임기자
박경리의 딸과 결혼… 1년 뒤에 ‘사형선고’문인 선배 장모의 ‘흰그늘’
“말로만 듣던 박경리 선생을 그날 처음 뵈었다. 얼굴이 굉장히 미인이셨다.…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김지하)
“서대문형무소에서 남편이 죽고 소설 ‘불신시대’를 쓰기 전에는 아들이 죽었지요. … 어느 날 ‘현대문학’ 편집장 김국태 씨가 지하와 함께 우리 집에 왔어요. 내가 글 잘 쓰는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잖아요.”(박경리)
1971년 가을의 만남을 김지하와 박경리가 생전 술회한 내용이다. 만 30세의 시인 김지하는 45세의 소설가 박경리가 따뜻이 대해주는 게 고마워 그 뒤로도 가끔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김지하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한 김영주는 한국 미술사 연구자였다.
김지하는 결혼 후 1년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소설 ‘토지’를 집필하고 있던 박경리는 딸과 함께 사위 옥바라지를 하며 손주를 돌봐야 했다.
시대의 역경 속에서도 사위는 한국 시문학, 장모는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호사가들은 두 사람이 문학 성취에 있어선 경쟁자라고 입방아를 찧었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일소에 부쳤다. 사위가 병증에 시달리면서도 생명운동에 몰두할 때, 장모는 토지문화재단을 만들고 토지문화관을 개관해 후배 문인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했다.
김지하는 박경리 사후 ‘흰그늘과 화엄(華嚴)’이라는 평문을 썼다. 박경리 소설이 고난 속에서도 굳굳히 살아가는 여성 서사의 ‘흰그늘’을 보여주며 모성이 새 문명을 짓는 ‘화엄개벽’을 예지했다는 내용이다. 자신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은 장모이자 선배 문인에 대한 존숭을 담아 생명운동 미학론을 헌정한 셈이다.
장재선 기자
“제 대학 시절 가까운 친구들이 우리들에게 어떤 신화적인 거리로 존재하고 있던 시인 김지하를 ‘지하 형, 지하 형’ 하고 부를 때마다 저는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곤 했는데, 1980년대 초였을까요? 어느 술집의 젊은 마담도 ‘지하 형’이라고 하질 않나, 골드몽릴게임 우연한 자리에 한 번은 가수 조용필 씨를 만났는데 그이도 ‘지하 형’이라고 부르더라고요.”
시인 황지우가 이렇게 되돌아봤다. 1998년 나온 책 ‘김지하의 사상기행 2’ 대담에서였다. 김지하(1941∼2022)가 웃었다. “나중에는 아들뻘 되는 새파란 대학생들도 지하 형이라 하데.”
실제로 1980년대 대학가에선 그를 본 10원야마토게임 적도 없는 새파란 운동권 학생들이 ‘지하 형’을 읊조리곤 했다. 앞 세대 민주화 투쟁의 신화적 인물을 근친화하며 동지의 자부를 누리려는 호칭이었다.
1973년 김수환(오른쪽) 추기경이 주례를 선 김지하 결혼식 사진. 쿨투라 제공
사이다쿨 ◇‘타는 목마름으로’의 시인
알려진 것처럼 김지하는 박정희 정권에서 반정부 운동 혐의로 세 번 투옥됐다. 1974년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으나, 필화로 재차 구속돼 독방에서 5년 9개월을 복역했다. 그 사이에 권력자들의 부패를 통렬히 풍자한 담시 ‘오적(五敵)’을 발표하고, 시집 ‘황 릴게임예시 톳길’을 펴냈다. 그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구전됐으며 1980년대에 곡이 붙어 민중가요로 불렸다.
그가 한국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자, 일본에서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시집을 출판하고 ‘김지하 구출 국제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는 1975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됐다. 같은 해 감옥에서 아 골드몽 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로부터 로터스상을 받았다. 1981년엔 세계시인대회의 위대한 시인상을 수상했다. 한국이 문화 변방이었을 때, 세계 무대에 우리 문학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알린 문인이었다.
그 아우라가 커서였을까, 2000년대 이후 기자로 김지하를 몇 차례 만났는데 그의 박람강기에 입을 벌리곤 했다. 얼음에 박 밀듯 쏟아내는 언설에 늘 어찔했다. 그는 거장들이 흔히 그러듯 세상의 예법에 무심했다. 2005년 그의 장모인 박경리(1926∼2008) 소설가의 팔순 잔치에서 조우했을 때, 그는 휴대전화기를 빌려달라고 하더니 누군가와 10여 분 통화를 한 후 고맙다는 말도 없이 휘적휘적 자기 길을 갔다.
그 몇 달 전 만났을 때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문예지들이 내게 청탁을 하지 않는다. 문예지들이 패거리에 의해 움직이는데, 내게는 패거리가 없잖은가.”
그는 문학판을 지배하는 좌파 진영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다고 여겼다. 자신이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생명운동파라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1970년대에 이미 감옥에서 생명이라는 화두를 발견했다고 말하곤 했다. 흙먼지 쌓인 철창 사이 홈에 풀씨가 싹을 틔우는 모습을 본 후 눈물을 흘리며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힘을 자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감옥에서 수운 최제우의 동학(東學)을 공부하고 불교, 노장학, 생태주의 철학사상 등을 궁구함으로써 자신만의 생명사상 기틀을 다졌다.
출옥 후인 1982년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문건을 작성해서 지인들에게 보여줬다. “죽음의 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었다. 국지적 반정부 운동을 넘어서 지구 차원의 문명 전환을 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때까지도 문학계에서는 그를 여전히 저항시인의 자리에 두고 있었다. 출판사 창작과비평이 1984년, 1985년 민중시인 시선집에 그를 포함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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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는 이 글 원제가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였는데 “조선일보 쪽에서 보다 자극적으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문사는 원제를 지면 제목으로 하고, 부제 중 하나로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를 넣었다. 그게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면 부제를 잘 뽑은 것이다. 글의 맨 앞과 끝부분에서 그 내용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1980년대 초반 박경리 작가가 손자(김지하 아들)를 업고 있는 모습. 고 김일주 작가 촬영
◇“민주화 투사가 어떻게…”
이 글은 반정부 운동 진영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민주화 투사가 어떻게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단 말인가.
민족문학작가회의(민작)는 김지하를 제명했다. 칼럼이 발표된 지 나흘 후였다. 민작은 1974년 사형 선고를 받은 김지하를 구명하려는 문인들이 만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후신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그 글을 계기로 운동권을 강력 비판하며 궁지에 몰렸던 정국을 반전시켰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정원식 총리 임명자 밀가루 세례 사건 등이 그 수단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지하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의 부인 김영주(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1946∼2019)의 생전 증언에 의하면, 운동권 동지·후배들로부터 욕설과 협박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김지하의 글은 죽음의 행렬을 부추기는 배후가 있다는 것을 은유적이면서도 격렬한 어조로 암시한다. 운동권은 터무니없는 음모론적 시각이라며 분노했다. 이 ‘배후론’ 혹은 ‘음모론’은 김지하 자신의 경험과 관련돼 있다. 감옥에 있을 때 바깥의 동지들이 그에게 더 극렬한 반정부 문건을 쓰도록 요구했는데, 정권을 자극해 그를 죽이게 하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가 죽으면 그 동력으로 체제를 엎으려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탓이다. 이와 관련, 부인 김영주는 “그 세력은 김지하를 구하려는 나와 엄마(박경리)도 죽이려 했다”라며 “누가 동지고 적인지 모르겠더라”고 말한 바 있다. 박경리는 “나는 이 악을 누구에게 말할까, 그냥 안고 가야겠다”라고 글에 썼다.
◇“사망자 13명 비이성적 상황”
김지하는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자신에게 변절이라는 말은 가당치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때 동지였던 이들의 돌팔매질과 집단 따돌림이 괴로워서 매일 집에서 소주만 들이켰다. 그 과정에서 감옥 독방에서 얻은 정신 분열이 더 심각해졌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운동권에선 그가 병증이 심해서 죽음의 굿판 같은 헛소리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흘러나왔다.
사실 김지하는 그 글을 쓰기 3개월 전인 2월 17일 동아일보 특별기고를 통해 정신 분열증을 고백했다. 정신병원에 두 번 입원해서 치료받은 사실을 숨겨 왔으나 이제 분명히 밝히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여인들의 몸에 임신을 시켰다가 낙태를 겪게 한 세 번의 경험도 털어놨다. 생명성 회복을 위한 사회적 고백 운동에 나서고자 하는 뜻에서 스스로 먼저 참회한 것이었다. 이런 그에게 그해 3월에서 5월까지 시국 관련 분신, 투신 등 사망자가 13명에 이른 상황이 예사롭게 보였겠는가.
작년에 ‘회성록(回省錄)’을 출간한 문학평론가 김명인은 그해 봄의 상황을 이렇게 되돌아봤다. “그 행렬에 어떤 비이성적인 충동이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분명 건강하지 못한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시절에 변혁운동가를 꿈꿨던 김명인이 김지하 글의 취지를 뒤늦게나마 인정한 셈이다. 그는 그러면서도 “여전히 낯선 ‘생명사상’류의 논조가 버성기다”고 했다.
사람에 따라선 그 글을 이 시점에 다시 읽으면 절박함을 느낄 듯싶다. 생명이 경시되는 쪽으로 마구 치닫는 세상에 대한 경고음으로. 김지하는 이렇게 썼다. “한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크다. 이것이 모든 참된 운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하편에 계속> 전임기자
박경리의 딸과 결혼… 1년 뒤에 ‘사형선고’문인 선배 장모의 ‘흰그늘’
“말로만 듣던 박경리 선생을 그날 처음 뵈었다. 얼굴이 굉장히 미인이셨다.… 역사 이야기가 나오자 식견이 보통 탁월한 것이 아니었다. 화엄불교, 동학에도 해박했고 동서양 역사는 물론 한국현대사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김지하)
“서대문형무소에서 남편이 죽고 소설 ‘불신시대’를 쓰기 전에는 아들이 죽었지요. … 어느 날 ‘현대문학’ 편집장 김국태 씨가 지하와 함께 우리 집에 왔어요. 내가 글 잘 쓰는 젊은이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잖아요.”(박경리)
1971년 가을의 만남을 김지하와 박경리가 생전 술회한 내용이다. 만 30세의 시인 김지하는 45세의 소설가 박경리가 따뜻이 대해주는 게 고마워 그 뒤로도 가끔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은 김지하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연세대 대학원을 졸업한 김영주는 한국 미술사 연구자였다.
김지하는 결혼 후 1년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당시 소설 ‘토지’를 집필하고 있던 박경리는 딸과 함께 사위 옥바라지를 하며 손주를 돌봐야 했다.
시대의 역경 속에서도 사위는 한국 시문학, 장모는 소설문학의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호사가들은 두 사람이 문학 성취에 있어선 경쟁자라고 입방아를 찧었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일소에 부쳤다. 사위가 병증에 시달리면서도 생명운동에 몰두할 때, 장모는 토지문화재단을 만들고 토지문화관을 개관해 후배 문인들에게 창작 공간을 제공했다.
김지하는 박경리 사후 ‘흰그늘과 화엄(華嚴)’이라는 평문을 썼다. 박경리 소설이 고난 속에서도 굳굳히 살아가는 여성 서사의 ‘흰그늘’을 보여주며 모성이 새 문명을 짓는 ‘화엄개벽’을 예지했다는 내용이다. 자신으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은 장모이자 선배 문인에 대한 존숭을 담아 생명운동 미학론을 헌정한 셈이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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