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식책상 위에 놓인 자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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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oajfieo 작성일25-08-11 22:10 조회1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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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치과
좌식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백등이 두툼한 메모지 위 정갈한 글씨를 비추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서(古書)의 이야기들이다. 조선 서지학의 최고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 명예교수가 반백년을 쏟아부어 일궈낸 거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문헌 5만여권을 추적한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는 현재 진행형. 구도자의 길을 가듯 지금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는 84세 백발의 학자를 지난달 만났다. 일본 전역에 흩어져있는 한국 고서를 평생의 업으로 추적하고 있는 조선 서지학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 도야마대 교수를 지난 11일 도야마 자택에서 만났다. 일본으로 유출된 고려와 조선의 고서 5만여권을 집요하게 조사한 그의 연구는 한국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앉은뱅이 책상 위엔 그의 조사 메모와 자료들이 수북하다. 김현예 특파원 “재미있어요.” 55년째 한국 고서를 찾아다니는 일이 고되지 않냐고 묻자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온다. 1941년 교토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엔 한자로 된 책들이 많아 자연스레 한자를 익혔다. 대학이란 선택지가 찾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12월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친이 사용하던 찻잔을 병원 세면장으로 가져가 씻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도 괜찮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무살 넘게 차이나 평소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형수였다. 대학 진학을 돕겠다는 형수의 말에,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들어간 곳은 교토대 문학부.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4학년, 오사카외국어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김사엽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초급 조선어부터 배웠는데 쉽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를 위해 『동아새국어사전』을 구해줬는데, 설명이 조선어로만 되어 있어 설명문을 읽으려고 또 단어를 찾아야 하는 되돌이표의 연속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에게 김 교수는 한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이 이뤄진 건 몇 년 뒤 박사과정 때의 일이었다. 1967년 4월 8일 오사카에서 배를 탔다. 이틀 걸려 도착한 부 좌식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백등이 두툼한 메모지 위 정갈한 글씨를 비추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서(古書)의 이야기들이다. 조선 서지학의 최고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 명예교수가 반백년을 쏟아부어 일궈낸 거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문헌 5만여권을 추적한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는 현재 진행형. 구도자의 길을 가듯 지금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는 84세 백발의 학자를 지난달 만났다. 일본 전역에 흩어져있는 한국 고서를 평생의 업으로 추적하고 있는 조선 서지학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 도야마대 교수를 지난 11일 도야마 자택에서 만났다. 일본으로 유출된 고려와 조선의 고서 5만여권을 집요하게 조사한 그의 연구는 한국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앉은뱅이 책상 위엔 그의 조사 메모와 자료들이 수북하다. 김현예 특파원 “재미있어요.” 55년째 한국 고서를 찾아다니는 일이 고되지 않냐고 묻자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온다. 1941년 교토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엔 한자로 된 책들이 많아 자연스레 한자를 익혔다. 대학이란 선택지가 찾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12월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친이 사용하던 찻잔을 병원 세면장으로 가져가 씻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도 괜찮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무살 넘게 차이나 평소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형수였다. 대학 진학을 돕겠다는 형수의 말에,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들어간 곳은 교토대 문학부.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4학년, 오사카외국어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김사엽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초급 조선어부터 배웠는데 쉽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를 위해 『동아새국어사전』을 구해줬는데, 설명이 조선어로만 되어 있어 설명문을 읽으려고 또 단어를 찾아야 하는 되돌이표의 연속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에게 김 교수는 한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이 이뤄진 건 몇 년 뒤 박사과정 때의 일이었다. 1967년 4월 8일 오사카에서 배를 탔다. 이틀 걸려 도착한 부산에서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가 맨 처음 간 곳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한글학회였다.“최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며 일본으
동두천치과
좌식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백등이 두툼한 메모지 위 정갈한 글씨를 비추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서(古書)의 이야기들이다. 조선 서지학의 최고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 명예교수가 반백년을 쏟아부어 일궈낸 거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문헌 5만여권을 추적한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는 현재 진행형. 구도자의 길을 가듯 지금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는 84세 백발의 학자를 지난달 만났다. 일본 전역에 흩어져있는 한국 고서를 평생의 업으로 추적하고 있는 조선 서지학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 도야마대 교수를 지난 11일 도야마 자택에서 만났다. 일본으로 유출된 고려와 조선의 고서 5만여권을 집요하게 조사한 그의 연구는 한국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앉은뱅이 책상 위엔 그의 조사 메모와 자료들이 수북하다. 김현예 특파원 “재미있어요.” 55년째 한국 고서를 찾아다니는 일이 고되지 않냐고 묻자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온다. 1941년 교토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엔 한자로 된 책들이 많아 자연스레 한자를 익혔다. 대학이란 선택지가 찾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12월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친이 사용하던 찻잔을 병원 세면장으로 가져가 씻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도 괜찮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무살 넘게 차이나 평소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형수였다. 대학 진학을 돕겠다는 형수의 말에,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들어간 곳은 교토대 문학부.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4학년, 오사카외국어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김사엽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초급 조선어부터 배웠는데 쉽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를 위해 『동아새국어사전』을 구해줬는데, 설명이 조선어로만 되어 있어 설명문을 읽으려고 또 단어를 찾아야 하는 되돌이표의 연속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에게 김 교수는 한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이 이뤄진 건 몇 년 뒤 박사과정 때의 일이었다. 1967년 4월 8일 오사카에서 배를 탔다. 이틀 걸려 도착한 부 좌식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백등이 두툼한 메모지 위 정갈한 글씨를 비추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서(古書)의 이야기들이다. 조선 서지학의 최고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 명예교수가 반백년을 쏟아부어 일궈낸 거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문헌 5만여권을 추적한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는 현재 진행형. 구도자의 길을 가듯 지금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는 84세 백발의 학자를 지난달 만났다. 일본 전역에 흩어져있는 한국 고서를 평생의 업으로 추적하고 있는 조선 서지학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 도야마대 교수를 지난 11일 도야마 자택에서 만났다. 일본으로 유출된 고려와 조선의 고서 5만여권을 집요하게 조사한 그의 연구는 한국학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앉은뱅이 책상 위엔 그의 조사 메모와 자료들이 수북하다. 김현예 특파원 “재미있어요.” 55년째 한국 고서를 찾아다니는 일이 고되지 않냐고 묻자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온다. 1941년 교토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엔 한자로 된 책들이 많아 자연스레 한자를 익혔다. 대학이란 선택지가 찾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12월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친이 사용하던 찻잔을 병원 세면장으로 가져가 씻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도 괜찮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무살 넘게 차이나 평소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형수였다. 대학 진학을 돕겠다는 형수의 말에,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들어간 곳은 교토대 문학부.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4학년, 오사카외국어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김사엽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초급 조선어부터 배웠는데 쉽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를 위해 『동아새국어사전』을 구해줬는데, 설명이 조선어로만 되어 있어 설명문을 읽으려고 또 단어를 찾아야 하는 되돌이표의 연속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에게 김 교수는 한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이 이뤄진 건 몇 년 뒤 박사과정 때의 일이었다. 1967년 4월 8일 오사카에서 배를 탔다. 이틀 걸려 도착한 부산에서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가 맨 처음 간 곳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한글학회였다.“최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며 일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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