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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slotmega.info
김지미 배우의 데뷔 초기 모습. 시원스러운 이목구비로 서구형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화면에서 올차고 여문 느낌을 줬다. 작가 정비석이 그를 만난 후 “뭇 남성들을 매혹하는 요부형 여성”이라고 평했으나, 요부역뿐만 아니라 곡절 많은 비애의 여주인공 역도 잘 소화해냈다. 한국영상자료원
최근 타계한 김지미(1940∼2025), 안성기(1950∼2026) 배우를 한자리에서 본 적이 있다. 지난 2010년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은퇴 파티에서였다 황금성오락실 . 이날 기념 촬영을 할 때 안성기 배우가 김지미, 신성일 등 선배들을 단상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2003년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지미는 당시 로스앤젤레스(LA)에 살고 있었는데, 부산영화제 회고전 주인공으로 와 있었다.
이때 사람들이 붐비는 홀에서 문성근이 홀로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1990년대에 영화계가 신·구 체제로 갈라져 보·혁 갈 릴게임꽁머니 등을 빚을 때, 김지미가 이사장이었던 한국영화인협회에 맞선 ‘충무로 포럼’의 핵심 인물이었다. 안성기가 홀 쪽의 문성근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어서, 이리 와.” 문이 어색한 표정으로 단상에 올라오자 김지미와 노장들이 슬며시 자리를 열어 줬다. 이 장면은 안성기의 넓은 품과 함께 영화계 보·혁 갈등의 여진(餘震)을 느끼게 해줬다.
바다이야기릴게임2
김지미가 지난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후배들과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문소리, 강수연, 김지미, 장미희, 예지원. 자료 사진
◇ “협회장 맡아달라는 요청에…”
김지미는 한국 영화사를 빛낸 스타 배우였다. 1957 릴게임사이트 년 ‘황혼열차’로 데뷔해 1992년까지 연기활동을 했다. 출연작으로 363편이 확인됐는데, 유실된 필름을 고려하면 700여 편으로 추정한다. 초기에 빼어난 외모로 각광을 받았으나, 점차 캐릭터를 지배하는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영화계에서 “도도하다” “통이 크고 인정이 많다”라는 평을 함께 들었다. 40대에 접어든 1980년대에 지미필름을 설립해 영화제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작자로 나섰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분단의 아픔과 사회의 그늘을 다룬 걸작 ‘길소뜸’, ‘티켓’을 만들었다.
김지미가 보·혁 갈등의 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19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을 때부터였다. 당시 영화계는 저질 상업영화의 범람, 대종상 불공정 시비, 업자 부패·탈세 등으로 내부가 곪아 있었다. 밖으로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상영 의무) 축소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던 영화인들이 찾아와 “협회를 맡아 업계 정화도 시키고 대외 간판이 돼 달라”고 수차례 청하자, 김지미는 “팬들 사랑에 대한 빚을 갚자”라는 마음으로 응했다.
이사장이 된 후 그는 여장부라는 별칭답게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로 협회 내홍을 다스리는 한편, 밖으로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에 나섰다. 그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 문제와 관련, “국가 차원에서 정해졌으니 시장 개방은 해 주되 받아낼 것을 받아내서 우리 영화를 육성시키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땐 속내를 표출하지 않았다. ‘외세 앞에서 우리 영화를 지키자’라는 영화운동 진영의 구호가 워낙 거셌던 탓이다.
영화운동 주도 세력은 직배, 스크린쿼터 문제를 ‘미국 제국주의의 문화침탈’로 봤다. 이는 그들이 1980년대 대학가 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운동권은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 혹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직배,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 영토를 미제(美帝)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영화운동 진영은 밖으로 ‘문화침탈’에 맞서는 한편, 안으론 ‘충무로 구체제’와 대립했다. 1994년 대종상 선정회의는 신·구 세대 대립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혁신을 내건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구세대 위원들이 내정한 수상작들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인협회를 맡은 김지미는 협회 안에 스크린쿼터 감시단 사무실을 마련해줬다. 이른바 신·구 세대 공존을 꾀한 셈이다. 영화운동 진영의 핵심 이론가 김혜준 등이 감시단을 꾸렸다. 그런데 그들이 감시 활동을 넘어서 검열철폐 성명 등에 나서자, 김지미는 협회가 반정부 활동을 지원할 수 없다며 사무실을 폐쇄했다.
김지미가 2019년 부산영화제에서 안성기(오른쪽) 배우와 함께 관객들과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 자료 사진
◇ DJ 지지한 김지미의 소신
영화운동 진영은 1998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정지영 감독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지미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충무로 포럼’을 만들어 구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배우 문성근이 대표였고, 기획자 유인택과 배우 명계남, 김혜준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곧 영화인협회에 맞설 새 조직으로 ‘한국영화인회의’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해 ‘영화진흥위원회’를 새로 출범시키며 그 위원장에 신세길 전 삼성물산 구주그룹 대표, 부위원장에 문성근 배우를 선임했다. 영화인협회 이사장인 김지미,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윤일봉 배우는 위원이었다. 이에 영화인협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위원 선임과 발족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신세길-문성근 체제는 무산됐고, 이에 따라 혁신 성향 위원들이 사퇴했다.
김대중 정부는 영화계 혁신 세력과 밀착돼 있었으나 김지미를 홀대하진 못했다. 그가 1970년 대선 때부터 정치인 김대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까닭이었다. 김지미는 시민이자 배우로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어떤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그가 정치권력의 정계 입문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의 김대중 지지는 ‘거래’를 낳았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에서 도와달라고 했고, 김지미는 지원 대가로 영진위 기금 2800억 원을 요구해 받아냈다. 물론 이는 사익이 아니라 영화계 발전을 위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배우 정체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앞에 언급했던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는 영화인회의를 만들어 기존 협회를 무력화한 문성근·명계남 등에 대해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영화 역사를 지켜온 선배들을 구세대라며 몰아내고, 혁명군의 기세로 정치 진영의 한쪽을 떠받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걔네들을 보게 되면, 잘하라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싶다”라고도 했다.
◇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이후 영화계는 영화인회의 세력이 이끌었다. 이들이 관련 기관과 각종 영화제 등을 장악했다. 간혹 보수 우파진영에서 반격에 나섰지만 큰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부산영화제 뒤풀이 등에서 영화인들끼리 ‘빨갱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고 강수연 배우가 했다는 말은 우리 시대 문화인의 처지를 ‘웃프게’ 대변한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다.”
충무로 구체제 인물 중 하나인 정진우 감독도 ‘양파’를 자처했다. 그는 혁신세력 핵심이었던 이용관 중앙대 교수가 부산영화제 위원장에서 축출됐다가 복귀할 때 추천서를 써줬다. 정치권력이 영화계에 간섭할 땐 좌·우 진영을 떠나서 함께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였다.
정진우 감독은 2019년 잠시 귀국한 김지미와 이용관 위원장, 그리고 역시 혁신세력 중심이었던 주진숙 영상자료원장 등을 함께 불러 화해의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를 계기로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김지미를 아시나요?’ 행사가 열렸다. 김지미는 이때 부산 영진위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공정환경센터장으로 일하는 김혜준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내가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20여 년 전 자신을 공격했던 젊은 운동가를 기억했던 것이다. 이때 김혜준은 김지미를 와락 껴안았다.
이날의 포옹으로 과거의 대립을 다 지울 수는 없지만, 서로를 더 미워하지 말자는 상징적 제스처의 의미는 컸다. 20세기 말에 젊음을 무기로 혁신의 깃발을 들었던 인물들이 이제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을 앓는 중견·노장이 됐다. 그동안 영화운동 진영의 타도 대상이었던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K-무비가 눈이 부시게 성장했다. 스크린쿼터라는 말은 영화사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할 정도로 영화계는 급변했다. 넷플릭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식민’이 안 되고 ‘주군’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색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이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도 우리가 세계 최빈국일 때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영화 예술을 일군 이들의 노력과 열정은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김동호 부산영화제창립위원장은 책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영화의 연대기는 한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합심하여 이루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합니다.”
‘리즈 테일러’ 수식어 비교말라했지만 닮아 김지미의 자존심과 결혼생활
< “리즈 테일러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 나는 나다.”/ 명자(明子)라는 일본 이름으로 태어나/ 17세 때부터 대한민국 여배우 지미(芝美)로 살아온 그가/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를 모태로 세상에 나온 700편의 영화도/ 어느 하나 숨으려 하지 않고/ 환한 빛 속에 제각기 당당했다.>
지난 2010년 김지미 배우를 만난 후 이런 메모를 했다. 그의 드높은 자부심에 매혹됐다고나 할까.
김지미는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17세 때 배우가 됐다. 그를 설득해 영화에 입문시킨 김기영 감독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외모가 특출났다.
김지미는 비교하지 말라고 했으나, 리즈 테일러(1932∼2011)와 여러모로 닮았다. 리즈는 오드리 헵번, 내털리 우드가 청순미로 인기를 끌 때 자신만의 완숙미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지미도 최은희를 비롯한 선배들과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후배 트로이카와 경쟁하며 독특한 매력을 과시했다. 예명 ‘지미’의 뜻대로 난초 같은 청초함의 대명사였는가 하면 올차고 오만하며 때로 비애가 감도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영화에서는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가정적으론 수차례 파경을 겪은 것도 리즈 테일러와 닮았다. 18세 때 16세 연상의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헤어졌다. 1963년 기혼인 최무룡과 결합하며 그의 전처에게 위자료를 직접 챙겨 줬는데, 6년 후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결별했다. 30대의 김지미는 7세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귀며 동거했는데, 그 기간은 7년을 넘지 않았다. 51세 때 심장 전문의인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나 11년 뒤 이혼했다. 김지미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여성은 모성 본능으로 남자를 감싸주고 싶어하는데….”
그는 말년의 23년을 네 형제와 두 딸(홍경임, 최영숙)이 있는 미국 LA에서 살았다. “손자들이 크는 걸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게 참 좋아요.” 화려한 스타가 아닌 평범한 할머니의 기쁨을 누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재선 기자
최근 타계한 김지미(1940∼2025), 안성기(1950∼2026) 배우를 한자리에서 본 적이 있다. 지난 2010년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은퇴 파티에서였다 황금성오락실 . 이날 기념 촬영을 할 때 안성기 배우가 김지미, 신성일 등 선배들을 단상으로 정중히 안내했다. 2003년 미국으로 건너갔던 김지미는 당시 로스앤젤레스(LA)에 살고 있었는데, 부산영화제 회고전 주인공으로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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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미가 지난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후배들과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문소리, 강수연, 김지미, 장미희, 예지원. 자료 사진
◇ “협회장 맡아달라는 요청에…”
김지미는 한국 영화사를 빛낸 스타 배우였다. 1957 릴게임사이트 년 ‘황혼열차’로 데뷔해 1992년까지 연기활동을 했다. 출연작으로 363편이 확인됐는데, 유실된 필름을 고려하면 700여 편으로 추정한다. 초기에 빼어난 외모로 각광을 받았으나, 점차 캐릭터를 지배하는 연기자로 인정받았다. 그는 영화계에서 “도도하다” “통이 크고 인정이 많다”라는 평을 함께 들었다. 40대에 접어든 1980년대에 지미필름을 설립해 영화제 메이저릴게임사이트 작자로 나섰다. 임권택 감독과 함께 분단의 아픔과 사회의 그늘을 다룬 걸작 ‘길소뜸’, ‘티켓’을 만들었다.
김지미가 보·혁 갈등의 복판으로 뛰어든 것은 19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을 때부터였다. 당시 영화계는 저질 상업영화의 범람, 대종상 불공정 시비, 업자 부패·탈세 등으로 내부가 곪아 있었다. 밖으로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상영 의무) 축소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고 싶었던 영화인들이 찾아와 “협회를 맡아 업계 정화도 시키고 대외 간판이 돼 달라”고 수차례 청하자, 김지미는 “팬들 사랑에 대한 빚을 갚자”라는 마음으로 응했다.
이사장이 된 후 그는 여장부라는 별칭답게 시원시원한 카리스마로 협회 내홍을 다스리는 한편, 밖으로 스크린쿼터 사수 운동에 나섰다. 그는 외화 직배와 스크린쿼터 문제와 관련, “국가 차원에서 정해졌으니 시장 개방은 해 주되 받아낼 것을 받아내서 우리 영화를 육성시키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땐 속내를 표출하지 않았다. ‘외세 앞에서 우리 영화를 지키자’라는 영화운동 진영의 구호가 워낙 거셌던 탓이다.
영화운동 주도 세력은 직배, 스크린쿼터 문제를 ‘미국 제국주의의 문화침탈’로 봤다. 이는 그들이 1980년대 대학가 운동을 기반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운동권은 한국 사회를 ‘식민지 반봉건사회’ 혹은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는 사회구성체 논쟁을 벌였다. 이 관점에서 보면 직배,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 영토를 미제(美帝)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것이었다.
영화운동 진영은 밖으로 ‘문화침탈’에 맞서는 한편, 안으론 ‘충무로 구체제’와 대립했다. 1994년 대종상 선정회의는 신·구 세대 대립을 극적으로 드러냈다. 혁신을 내건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구세대 위원들이 내정한 수상작들을 바꿔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인협회를 맡은 김지미는 협회 안에 스크린쿼터 감시단 사무실을 마련해줬다. 이른바 신·구 세대 공존을 꾀한 셈이다. 영화운동 진영의 핵심 이론가 김혜준 등이 감시단을 꾸렸다. 그런데 그들이 감시 활동을 넘어서 검열철폐 성명 등에 나서자, 김지미는 협회가 반정부 활동을 지원할 수 없다며 사무실을 폐쇄했다.
김지미가 2019년 부산영화제에서 안성기(오른쪽) 배우와 함께 관객들과 대화를 하며 웃는 모습. 자료 사진
◇ DJ 지지한 김지미의 소신
영화운동 진영은 1998년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정지영 감독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지미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 이에 그들은 ‘충무로 포럼’을 만들어 구체제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배우 문성근이 대표였고, 기획자 유인택과 배우 명계남, 김혜준이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곧 영화인협회에 맞설 새 조직으로 ‘한국영화인회의’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정부는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해 ‘영화진흥위원회’를 새로 출범시키며 그 위원장에 신세길 전 삼성물산 구주그룹 대표, 부위원장에 문성근 배우를 선임했다. 영화인협회 이사장인 김지미,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지낸 윤일봉 배우는 위원이었다. 이에 영화인협회는 기자회견을 열어 위원 선임과 발족 절차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신세길-문성근 체제는 무산됐고, 이에 따라 혁신 성향 위원들이 사퇴했다.
김대중 정부는 영화계 혁신 세력과 밀착돼 있었으나 김지미를 홀대하진 못했다. 그가 1970년 대선 때부터 정치인 김대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까닭이었다. 김지미는 시민이자 배우로서 누군가를 지지하는 것은 어떤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그가 정치권력의 정계 입문 요청을 수차례 거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그런데 그의 김대중 지지는 ‘거래’를 낳았다. 19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 측에서 도와달라고 했고, 김지미는 지원 대가로 영진위 기금 2800억 원을 요구해 받아냈다. 물론 이는 사익이 아니라 영화계 발전을 위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배우 정체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한 번도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걸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앞에 언급했던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는 영화인회의를 만들어 기존 협회를 무력화한 문성근·명계남 등에 대해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영화 역사를 지켜온 선배들을 구세대라며 몰아내고, 혁명군의 기세로 정치 진영의 한쪽을 떠받친 것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면서도 “걔네들을 보게 되면, 잘하라고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싶다”라고도 했다.
◇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
주지하다시피 2000년대 이후 영화계는 영화인회의 세력이 이끌었다. 이들이 관련 기관과 각종 영화제 등을 장악했다. 간혹 보수 우파진영에서 반격에 나섰지만 큰 흐름을 되돌리진 못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부산영화제 뒤풀이 등에서 영화인들끼리 ‘빨갱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고 강수연 배우가 했다는 말은 우리 시대 문화인의 처지를 ‘웃프게’ 대변한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양파다.”
충무로 구체제 인물 중 하나인 정진우 감독도 ‘양파’를 자처했다. 그는 혁신세력 핵심이었던 이용관 중앙대 교수가 부산영화제 위원장에서 축출됐다가 복귀할 때 추천서를 써줬다. 정치권력이 영화계에 간섭할 땐 좌·우 진영을 떠나서 함께 막아야 한다는 차원에서였다.
정진우 감독은 2019년 잠시 귀국한 김지미와 이용관 위원장, 그리고 역시 혁신세력 중심이었던 주진숙 영상자료원장 등을 함께 불러 화해의 저녁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를 계기로 같은 해 부산영화제에서 ‘김지미를 아시나요?’ 행사가 열렸다. 김지미는 이때 부산 영진위를 방문했는데, 거기서 공정환경센터장으로 일하는 김혜준을 보고 깜짝 놀라며 “내가 이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20여 년 전 자신을 공격했던 젊은 운동가를 기억했던 것이다. 이때 김혜준은 김지미를 와락 껴안았다.
이날의 포옹으로 과거의 대립을 다 지울 수는 없지만, 서로를 더 미워하지 말자는 상징적 제스처의 의미는 컸다. 20세기 말에 젊음을 무기로 혁신의 깃발을 들었던 인물들이 이제 변화의 속도에 현기증을 앓는 중견·노장이 됐다. 그동안 영화운동 진영의 타도 대상이었던 대기업 자본을 바탕으로 K-무비가 눈이 부시게 성장했다. 스크린쿼터라는 말은 영화사박물관에서나 찾아야 할 정도로 영화계는 급변했다. 넷플릭스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식민’이 안 되고 ‘주군’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색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이다.
이 어지러운 시대에도 우리가 세계 최빈국일 때 열악한 환경을 딛고 영화 예술을 일군 이들의 노력과 열정은 큰 자산이 되어줄 것이다. 김동호 부산영화제창립위원장은 책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한국영화의 연대기는 한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합심하여 이루는 역사의 현장이 아닌가 합니다.”
‘리즈 테일러’ 수식어 비교말라했지만 닮아 김지미의 자존심과 결혼생활
< “리즈 테일러와 나를 비교하지 말라. 나는 나다.”/ 명자(明子)라는 일본 이름으로 태어나/ 17세 때부터 대한민국 여배우 지미(芝美)로 살아온 그가/ 나는 나다, 라고 말하는 순간/ 그를 모태로 세상에 나온 700편의 영화도/ 어느 하나 숨으려 하지 않고/ 환한 빛 속에 제각기 당당했다.>
지난 2010년 김지미 배우를 만난 후 이런 메모를 했다. 그의 드높은 자부심에 매혹됐다고나 할까.
김지미는 사업가 집안에서 자라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17세 때 배우가 됐다. 그를 설득해 영화에 입문시킨 김기영 감독이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라고 했을 정도로 외모가 특출났다.
김지미는 비교하지 말라고 했으나, 리즈 테일러(1932∼2011)와 여러모로 닮았다. 리즈는 오드리 헵번, 내털리 우드가 청순미로 인기를 끌 때 자신만의 완숙미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지미도 최은희를 비롯한 선배들과 문희, 윤정희, 남정임 등 후배 트로이카와 경쟁하며 독특한 매력을 과시했다. 예명 ‘지미’의 뜻대로 난초 같은 청초함의 대명사였는가 하면 올차고 오만하며 때로 비애가 감도는 역할을 잘 소화했다.
영화에서는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가정적으론 수차례 파경을 겪은 것도 리즈 테일러와 닮았다. 18세 때 16세 연상의 홍성기 감독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헤어졌다. 1963년 기혼인 최무룡과 결합하며 그의 전처에게 위자료를 직접 챙겨 줬는데, 6년 후 두 사람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기고 결별했다. 30대의 김지미는 7세 연하의 가수 나훈아와 사귀며 동거했는데, 그 기간은 7년을 넘지 않았다. 51세 때 심장 전문의인 이종구 박사와 결혼했으나 11년 뒤 이혼했다. 김지미는 생전 이렇게 말했다. “남자는 항상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여성은 모성 본능으로 남자를 감싸주고 싶어하는데….”
그는 말년의 23년을 네 형제와 두 딸(홍경임, 최영숙)이 있는 미국 LA에서 살았다. “손자들이 크는 걸 보며 조용히 지내는 게 참 좋아요.” 화려한 스타가 아닌 평범한 할머니의 기쁨을 누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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