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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고 싶었다. 다 내려놓고, 그림 같은 초원에서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고 싶었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택한 곳이 굴업도였다.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을 닮은 개머리언덕으로 갔다.
50대가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생활은 탄탄해지고, 마음도 단단해져 아름드리나무처럼 거대해질 줄 알았다. 나는 매일 흔들리고, 꺾이고, 무너지고 있었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의 공허한 어둠은, 허망한 해일이었다.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동안 가루가 되어 흩어진 마음이 제멋대로 허파에 쌓여 있다가, 예고도 없이 울컥하고 터져 나인터넷야마토
오는 날에도 웃었다. 겉으론 웃고, 속으로 우는 지리멸렬한 마음을 그림 같은 섬에서 말릴 참이었다.
중계탑 봉우리에서 개머리언덕으로 이어진 능선.
굴업도에 내린 빙하기의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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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듯 꽉 찼다. 비우려 왔으나, 비울 수 없었다. 텐트, 침낭, 의자, 먹을 것들, 무엇하나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반백년을 살면 현명해질 줄 알았는데, 배낭 무게 1kg 줄이기, 욕심 하나 내려놓기, 안락함 하나 버리기 어렵다. 장비는 삐까뻔쩍한데 마음은 가난한 이의 굴업도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3시간 만에 나타난 섬은 기묘했다DGB금융지주 주식
. 스리슬쩍 몸을 낮춰 수면 위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다른 섬은 존재감을 과시하려 능선을 곧추 세우는데, 굴업도는 낮고 부드러운 굴곡이다. 잠에서 덜 깬 걸까. 부끄러운 걸까. 해무를 이불처럼 끌어당기며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부드럽고 투명한 섬은 누군가 알아 주기를 바라지 않는, 혼자서도 행복이 차오르는 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럭키세븐
붉은모래해변의 분화구처럼 움푹 패인 곳.
나는 겨울이다. 봄을 찾으러 온 여행객들 사이에서 혼자 빙하에 갇혀 있었다. 극적인 변화를 바라고 오지는 않았다. 다만 냉기를 녹일 계기가 필요했다. 유튜브 처세술이나, 마음을 다스리는 디지털 해법바다이야기황금고래
이 아닌, 그냥 자연의 풍경이 되고 싶었다. 찾으려 하면 더 멀어짐을 알고 있었다. 젊은 청춘들의 희희낙락 하는 표정에는, 설렘과 욕망이 깃들어 있었다. 미혹되지 않는 불혹不惑을 지나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 아니던가. 이성에 끌려 순진하게 애태우던 불나방 같은 시간은 지나갔다.
민박집 트럭에 배낭을 싣는 남녀 무리를 지나쳤다. 숙박을 하지 않아도 마을까지 차를 태워 주지만, 느린 방법을 택했다. 80리터 배낭을 메고 걷는 건, 스스로에게 내리는 형벌이자 굴업도와 나누는 대화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잘못을 한 것만 같은 지난 세월, 가슴에 사무치는 사람과 꿈같은 시간이 없었겠나. 이젠 그 세월이 말동무이자 동행이다. 빌딩을 가진 동창도, 누구나 아는 브랜드 대표이사가 된 친구도 부럽지 않은데, 훌륭한 자녀를 둔 친구는 부러웠다.
산길과 찻길을 번갈아 삼켜 마을을 지나는데, 한 여인을 만났다. 처음 본 사람에게 "함께 밥을 먹자"고 하여, 의아하게 바라보자 자기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다. 며칠 전에 미리 3명 식사를 예약했는데, 일행 중 한 명이 못 오는 바람에 식사가 남게 된 것. 당일에 취소하기 곤란해 초면에 말을 붙인 것이었다.
연평산 지능선. 뒤로 목기미해변과 개머리언덕으로 뻗은 능선이 드러난다.
머리는 거절하고 싶었으나, 새벽에 집을 나온 이후 아무 것도 먹질 않아 허기가 먼저 "그러시죠"라고 답해 버린 후였다. "살았다"며 크게 웃는 여인의 얼굴을 그제야 제대로 보았다. 피부는 맑았고, 머리카락은 풍성했으며, 목의 선이 고왔다. 라일락 향기가 와락 덮쳤다. 향기가 심장을 조일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식당 겸 민박을 운영하는 할머니가 내어주는 시골밥상이 마음을 무장해제시켰다. 흰 쌀밥과 미역국, 정갈한 반찬과 생선구이가 열 마디 말보다 사람을 도닥이는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동행인 남자는 나보다 말수가 없었다.
"섬주예요. 진섬주. 섬 주인은 아니지만, 굴업도 같은 섬은 주인이 되고 싶네요."
122m봉 개머리언덕 정상부에서 본 수크령 초원.
우리의 공통점은 굴업도가 처음이라는 것이었고, 목적지가 개머리언덕으로 같았다. 함께 밥을 먹으며 사소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식사를 마치자, 서먹한 사이가 조금 풀렸다. 남녀의 대화를 들어 보면 오랜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사겠다는 여인의 말을 정중히 사양하고, 배낭을 멨다.
당신이 말한 '폭풍의 언덕'
마을을 빠져나오자, 해변이었다. 아무도 없는 흰 모래해변은 2년 전 꿈에 본 곳. 해변을 걷고 있으면서도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포말의 손길로 밀려왔다. 1km 넘는 해변에 혼자라니,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고독이 한 움큼씩 솟아올랐다. 민박집 할머니는 "굴업도는 천적이 없는 사슴 때문에 특산물이라 할 만한 게 없다"고 했지만, 굴업도의 특산물은 고독이었다.
수크령 초원의 사슴.
꿈에서 죽은 이를 종종 만난다. 그녀는 살아 있었고, 우리는 함께 해변을 걸었다. 같이 걷는 것만으로 너무 다정해 꿈에서 깨면 베개가 젖도록 울었다. 어느 해 노을이 지는 수평선 끝으로 가자고 하여, 갔던 서해는 망망대해가 아니었다. 미세먼지로 노을도 없던 날, 와락 쏟아지던 당신 눈물이 노을 때문인지, 암 투병 때문인지 헷갈렸던 그 시간이 너무 그리워. 이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고요해지겠다고 했지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아내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해변 끝에서 좁은 산길을 만났다. 가파르고, 거친 산길. 배낭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고, 통증이 온 몸으로 번져갔다. 호흡이 극도로 가빠왔지만,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르막을 올랐다. 고통은 모두 내 것. 그녀를 지켜내지 못한 나에게 내리는 형벌. 나는 더 고통스러워야 한다.
"오리가 땅 파는 사람으로 바뀐 섬이 어디인지 알아? 서해 먼 바다에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듯한 섬이 있대. 섬 이름이 등을 구부리고 떠 있는 오리라는 굴압屈鴨도에서 쟁기로 갈 만한 땅이 없어 괭이로 땅을 파야 한다고 굴업掘業도가 되었는데. 벌써 재밌지 않아? 굴업도에 가면 나는 캐서린, 당신은 히스클리프가 되는 거야."
연평산 사구. 왼쪽으로 솟은 봉우리가 굴업도 최고봉인 덕물산(137m)이다.
"그래, 다음에 가자"고 몇 번씩 말을 돌렸던, 나를 용서할 수 없어서 폭풍의 언덕에 혼자 섰다. 많이 늦었지만 네가 보고 싶어했던 그 언덕이었다. 봄도 겨울도 아닌 어중간한 계절, 누런 빛깔의 초원은 황량했다. 거센 바람이 한참 늦게 온 사내의 멱살을 잡고, 재킷을 풀어 헤쳐 가슴을 할퀴고 갔다.
갈림길에 이르러 멈췄을 때, 그녀가 뒤에 있었다. "오른쪽이 억새밭 방향인가요?"라는 물음에 그녀는 "억새 아녜요"라며 풀 가까이 이끌었다.
"억척스럽고 미련한 한국 엄마 같은 풀이에요. 일본 이름은 한자로 '력지力芝', 힘센 풀이란 뜻이에요. 억새고 질기고 강인해서 굴업도처럼 척박하고 바닷바람 강한 데서도 살아남은 거죠. 수크령인데, 옛날에는 길갱이라고 불렀어요. 길가에 사는 힘세고 질긴 놈이라 생긴 이름이죠. 머리새, 개꼬리풀이라고도 불렀는데 아마 개머리언덕은 개의 머리가 아니라 이 풀 때문에 생긴 이름일지도 몰라요."
굴업도 개머리언덕의 백패커들. 봄·가을 주말이면 백패커들로 북적인다.
여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훅 안겨오는 라일락 향기에 정신이 아찔하다. 화장기 없는 매끄러운 피부와 맑은 흰자위, 우물 같은 검은 눈동자. 20년 전에도 같은 눈동자의 여인을 섬에서 만났다. 바람피우지도 않았는데, 죄책감이 땅 속으로 잡아당겼다. 한 발자국 떨어지며 "어떻게 알아요?" 묻자, "우리 엄마가 길갱이를 좋아했거든요" 답한다.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섬주씨와 동행인 남자와 함께 걸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텐트 부근을 지나 수크령언덕이 바다와 만나는 벼랑 끝에 텐트를 쳤다. 수평선만 있는 노을을 볼 계획이었다, 그들도 근처에 터를 잡았다. 캠핑 의자에 앉아 노을을 기다렸다. 이윽고 붉게 하늘이 물들었다. 삼킬 듯이 바람이 불어왔다. 텐트가 너무 심하게 기울고 펄럭이는 통에 철수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수평선과 붉은 해만 남은 세상. 생전에는 일에 몰두했고, 사후에는 사랑에 몰두하는 꼴이라니. 빈 잔에 술을 채우고 간단히 음식을 차려 놓았다. 노을이 완전히 질 때까지 허공에 술잔을 뿌렸다가 채우기를 반복했다. 이런 순간에도 초면인 여인을 의식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지만, 이것도 나였다.
개머리언덕 끝에는 벼랑과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밤 12시의 소란
복수심에 찬 히스클리프가 텐트를 잡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고 추위를 견디는 것도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밤 12시가 되자, 기척이 없던 남녀가 텐트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여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텐트 밖으로 나가자, 두 사람이 바다가 있는 벼랑 끝에 가까이 있는 게 보였다. 판단할 겨를도 없이 다가갔다.
남자가 항아리 안에 든 흰 가루를 허공에 뿌리고, 섬주씨는 항아리를 잡은 채 울고 있었다. 센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이는 모습이 불안해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우리 누나 좀 잡아 주세요"라고 말했다.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엄마! 길갱이언덕이야. 너무 늦게 보여 줘서 미안해. 고생만 하고…"라며 흐느끼는 와중에 라일락 향기와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큰 파도처럼 밀려와 벼랑에 부서졌다.
"손 잡아줄래요?"라며 손을 내민 그녀는 나머지 한 손으로 벼랑 너머 허공으로 흩어지는 흰 가루를 향해 뻗었다. 강한 바람이 와락 불어 닥쳤고, 휘청이는 그녀를 안았다. 벼랑 끝에서 겨우 균형을 잡아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텐트가 날아와서 부딪혔다. 그녀를 땅으로 밀어내고 균형을 잃었다. 사랑을 잃었다. 가라앉을수록 고요하여 당신 말소리도, 라일락 향기도 나지 않았다.
노을로 물드는 길갱이(수크령) 초원의 남과 여.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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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주예요. 진섬주. 섬 주인은 아니지만, 굴업도 같은 섬은 주인이 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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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공통점은 굴업도가 처음이라는 것이었고, 목적지가 개머리언덕으로 같았다. 함께 밥을 먹으며 사소한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식사를 마치자, 서먹한 사이가 조금 풀렸다. 남녀의 대화를 들어 보면 오랜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닐 가능성도 있지만, 둘 사이에 끼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사겠다는 여인의 말을 정중히 사양하고, 배낭을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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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크령 초원의 사슴.
꿈에서 죽은 이를 종종 만난다. 그녀는 살아 있었고, 우리는 함께 해변을 걸었다. 같이 걷는 것만으로 너무 다정해 꿈에서 깨면 베개가 젖도록 울었다. 어느 해 노을이 지는 수평선 끝으로 가자고 하여, 갔던 서해는 망망대해가 아니었다. 미세먼지로 노을도 없던 날, 와락 쏟아지던 당신 눈물이 노을 때문인지, 암 투병 때문인지 헷갈렸던 그 시간이 너무 그리워. 이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고요해지겠다고 했지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살아내는 스스로가 가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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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가 땅 파는 사람으로 바뀐 섬이 어디인지 알아? 서해 먼 바다에 소설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듯한 섬이 있대. 섬 이름이 등을 구부리고 떠 있는 오리라는 굴압屈鴨도에서 쟁기로 갈 만한 땅이 없어 괭이로 땅을 파야 한다고 굴업掘業도가 되었는데. 벌써 재밌지 않아? 굴업도에 가면 나는 캐서린, 당신은 히스클리프가 되는 거야."
연평산 사구. 왼쪽으로 솟은 봉우리가 굴업도 최고봉인 덕물산(137m)이다.
"그래, 다음에 가자"고 몇 번씩 말을 돌렸던, 나를 용서할 수 없어서 폭풍의 언덕에 혼자 섰다. 많이 늦었지만 네가 보고 싶어했던 그 언덕이었다. 봄도 겨울도 아닌 어중간한 계절, 누런 빛깔의 초원은 황량했다. 거센 바람이 한참 늦게 온 사내의 멱살을 잡고, 재킷을 풀어 헤쳐 가슴을 할퀴고 갔다.
갈림길에 이르러 멈췄을 때, 그녀가 뒤에 있었다. "오른쪽이 억새밭 방향인가요?"라는 물음에 그녀는 "억새 아녜요"라며 풀 가까이 이끌었다.
"억척스럽고 미련한 한국 엄마 같은 풀이에요. 일본 이름은 한자로 '력지力芝', 힘센 풀이란 뜻이에요. 억새고 질기고 강인해서 굴업도처럼 척박하고 바닷바람 강한 데서도 살아남은 거죠. 수크령인데, 옛날에는 길갱이라고 불렀어요. 길가에 사는 힘세고 질긴 놈이라 생긴 이름이죠. 머리새, 개꼬리풀이라고도 불렀는데 아마 개머리언덕은 개의 머리가 아니라 이 풀 때문에 생긴 이름일지도 몰라요."
굴업도 개머리언덕의 백패커들. 봄·가을 주말이면 백패커들로 북적인다.
여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훅 안겨오는 라일락 향기에 정신이 아찔하다. 화장기 없는 매끄러운 피부와 맑은 흰자위, 우물 같은 검은 눈동자. 20년 전에도 같은 눈동자의 여인을 섬에서 만났다. 바람피우지도 않았는데, 죄책감이 땅 속으로 잡아당겼다. 한 발자국 떨어지며 "어떻게 알아요?" 묻자, "우리 엄마가 길갱이를 좋아했거든요" 답한다. 얼굴빛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섬주씨와 동행인 남자와 함께 걸었다. 사람들이 몰려 있는 텐트 부근을 지나 수크령언덕이 바다와 만나는 벼랑 끝에 텐트를 쳤다. 수평선만 있는 노을을 볼 계획이었다, 그들도 근처에 터를 잡았다. 캠핑 의자에 앉아 노을을 기다렸다. 이윽고 붉게 하늘이 물들었다. 삼킬 듯이 바람이 불어왔다. 텐트가 너무 심하게 기울고 펄럭이는 통에 철수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수평선과 붉은 해만 남은 세상. 생전에는 일에 몰두했고, 사후에는 사랑에 몰두하는 꼴이라니. 빈 잔에 술을 채우고 간단히 음식을 차려 놓았다. 노을이 완전히 질 때까지 허공에 술잔을 뿌렸다가 채우기를 반복했다. 이런 순간에도 초면인 여인을 의식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었지만, 이것도 나였다.
개머리언덕 끝에는 벼랑과 망망대해가 펼쳐진다.
밤 12시의 소란
복수심에 찬 히스클리프가 텐트를 잡고 흔드는 것만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았고 추위를 견디는 것도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밤 12시가 되자, 기척이 없던 남녀가 텐트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여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텐트 밖으로 나가자, 두 사람이 바다가 있는 벼랑 끝에 가까이 있는 게 보였다. 판단할 겨를도 없이 다가갔다.
남자가 항아리 안에 든 흰 가루를 허공에 뿌리고, 섬주씨는 항아리를 잡은 채 울고 있었다. 센 바람이 불 때마다 휘청이는 모습이 불안해 "괜찮으세요?"라고 물었다. 남자는 "우리 누나 좀 잡아 주세요"라고 말했다. 벼랑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엄마! 길갱이언덕이야. 너무 늦게 보여 줘서 미안해. 고생만 하고…"라며 흐느끼는 와중에 라일락 향기와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녀를 안고 싶다는 욕망이 큰 파도처럼 밀려와 벼랑에 부서졌다.
"손 잡아줄래요?"라며 손을 내민 그녀는 나머지 한 손으로 벼랑 너머 허공으로 흩어지는 흰 가루를 향해 뻗었다. 강한 바람이 와락 불어 닥쳤고, 휘청이는 그녀를 안았다. 벼랑 끝에서 겨우 균형을 잡아 살았다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텐트가 날아와서 부딪혔다. 그녀를 땅으로 밀어내고 균형을 잃었다. 사랑을 잃었다. 가라앉을수록 고요하여 당신 말소리도, 라일락 향기도 나지 않았다.
노을로 물드는 길갱이(수크령) 초원의 남과 여.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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